국사/고려

제갈량이었나? 태조 왕건의 목숨을 구한 책사 고려 최응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4. 3. 3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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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었나? 태조 왕건의 목숨을 구한 책사 고려 최응 그는 누구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레전드 사극을 뽑으라면 아마 대부분이 태조 왕건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이 태조 왕건에서 나온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책사로서 지략과 내치를 두루 겸비한 대표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바로 왕건의 목숨을 구한 최응을 뽑을 것이다. 최응 그는 고려사에서 어떠한 인물이었고, 실제 역사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고려 최응
드라마 <태조왕건> 고려 최응 역의 정태우

1. 고려 최응의 출생 - 천재가 태어나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최응은 거의 신에 가까운 예지력과 책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도 그러했을까?

 

고려 최응의 출생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고려 대부분의 이름 있다 하는 신하들도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는데 최응은 드물게 태어날 때부터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최응은 궁예가 집권하던 태봉 시절 지금의 황해도 황주의 나름 높은 벼슬을 하고 있던 최우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재미있는 것이 그 아내가 최응을 임심 했을 때 집의 오이 나무에 참외가 열리는 믿겨지지 않는 현상이 일어났고, 이같은 이야기가 소문이나서 궁예의 귓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궁예가 이 일을 이상히 여겨 점을 치고는, "그 아이가 만약 아들로 태어나면 나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기르지 말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우달은 최응을 얻었고 이에 숨겨서 몰래 길렀다. 그런데 이 최응이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어서 사서오경을 달달 외웠으며 문장이 뛰어나니 10대라는 나이로 궁예에게 발탁되어 궁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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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최응 왕건을 살리다

최응이 이름을 알린 것은 왕건을 구해준 일화 때문이다. 궁예가 미쳐 날 뛰면서 자신의 능력으로 남의 마음을 읽는다는 관심법이라는 능력(?)으로 세계 역사 초유의 무단통치를 실시하면서 자신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을 의심하면서 학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신임했던 왕건마저 관심법을 통해 시험 해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때, 최응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붓을 떨어트리고는 줍는 척을 하며 왕건에게 귓속말로 말한다. '그냥 모반하려 하였다고 인정하시옵소서' 그러자 왕건은 최응의 말을 듣고는 그대로 하였고, 궁예는 왕건 같은 신하가 참으로 정직하다면서 그를 인정하고 큰 상까지 주었다.

 

궁예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당시 가장 애정하던 왕건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위상을 살려주니 좋았던 것, 여튼 이 일을 계기로 최응은 왕건의 눈에 들게 된다. 

고려 최응
고려 책사 최응

3. 왕건 집권 후 최응

태조 왕건이 폭정에 미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왕으로 등극했을 때, 최응 역시 궁예에 이어 왕건의 총애를 받아 조정에서 승승 장구한다. 

 

무엇보다 왕건의 지근거리에서 왕명을 받드는 지금의 비서실장 역할의 원봉성에 있었고, 여기에 문무백관을 돌보고 의결하는 광평성의 광평낭중, 여기에 지금의 행정안전부격인 내봉성의 내봉성령 등 당시 30살 쯤 되는 젊은 나이에 고려의 최고 요직을 두루 섭렵한다. 이것으로 볼 때,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처럼 최응의 능력과 왕건의 신뢰는 거의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문장도 뛰어나서 왕건이 말하길, "신라가 9층 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 했으니 나도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세워 삼한 통일의 기원을 올리고자 하니 최응으로 하여금 그 문장을 지어달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그는 당시 성인이라 불리며 매일 목욕재계를 통해 그 몸을 가꾸었고, 고기는 일체 먹지 않았다. 또한 그 몸이 약해졌을 때도 고기를 먹지 않아 왕건이 신하를 보내 최응에게 고기를 먹고 힘내라고 했으나 최응이 듣지 않자, 왕건이 직접 최응을 찾아 '고기를 먹지 않으면 불충이고 불효다, 고기를 먹지 않고 명이 짧아지면 그만큼의 불충은 없다'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고기를 먹었다고 전한다. 

 

한 나라의 왕이 신하가 고기를 안먹어서 고기를 먹으라고 직접 찾고 경고했다는 것 만봐도 왕건이 얼마나 최응을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최응의 죽음 

천재는 명이 짧다는 말이 최응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최응은 불과 34살의 나이인 932년 세상을 떠났는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 936년이니 최응은 안타깝게도 후삼국의 과업을 보지 못한 것이다. 최응은 사후 대광 사도 태자태부에 추증되었고 현종대에 이르러 태조 묘정에 올랐다. 

 

참고로 후삼국 시대의 천재라 불린 3명의 최씨를 보고 신라 3최라 불렀는데, 이때 최응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 3최는 신라 최치원, 후백제 최승우, 고려 최언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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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부터 왕건의 집권 때까지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아 왕건의 총애를 받고 내정에 힘썼던 최응... 다만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처럼 마치 전투에 나가 제갈량과 같은 책사로 활동했다기 보다는 내정과 고려 조정의 안정에 힘쓰며 그 능력을 발휘한 전형적인 문신이었음은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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