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귀주대첩! 승전의 고려 기병대의 주인공 김종현 장군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4. 2. 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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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승전의 고려 기병대의 주인공 김종현 장군 그는 누구인가?

동북아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고려거란의 3차 전쟁, 자랑스러운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강감찬과 함께 했던 장군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전설의 고려 기병대를 이끌었던 김종현 장군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 중 한명이다. 보병 중심의 고려군에서 기병을 이끌고 귀주대첩 승리의 공훈이 있는 김종현 장군 그는 누구인가? 

 

고려 김종현 장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장군 김종현

 

1. 김종현 장군의 기록은 많이 없다? 

김종현 장군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랐고 무슨 벼슬을 걸어왔는지는 심지어 어떻게 죽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역사속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고려 역사에 등장한 것은 1011년 현종 2년 감찰어사(지금의 감사실 및 검찰)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가장 처음이다. 감찰어사라는 벼슬을 볼 때 김종현 장군은 강감찬 장군과 마찬가지로 역시 문관 출신으로 보인다.

2. 귀주대첩의 전개와 김종현 장군의 등장 

거란의 소배압이 고려를 침입한 1018년, 소배압의 거란 정예병 십만은 지금의 의주인 흥화진부터 밀고 내려온다. 그러나 이때 강감찬 장군은 의주 삼교천에서 고려군을 매복시킨 후 굵은 줄로 쇠가죽을 꼬매 강을 막고 있다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 이를 풀어버린다. 우리나라 역사상 손꼽히는 수공 전술이었다. 

 

이후 고려군의 수공에 당황한 거란군이 어쩔줄을 몰라하자 고려군은 전투를 벌이니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거란의 대표 맹장인 소배압은 고려의 약점은 개경에 있는 왕 현종임을 알아채고, 피해를 무시한 채 날랜 기병들을 빼내어 진격한다. 

 

강감찬은 소배압의 이 같은 움직임에 고려의 기병 10,000명을 빼내어 소배압을 막으라 지시하였고, 이때 기병을 이끈 장수가 바로 강감찬의 휘하에서 병마판관으로 있던 김종현이다. 

3. 개경을 앞에 둔 소배압이 당황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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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배압은 고려군의 거센 저항을 뿌리치며 미친 듯이 남하를 하여 개경을 향해간다. 소배압이 개경을 백리 정도 남겨두고 그는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거란군은 2차침입때도 그랬지만 군수물품을 이동하면서 약탈을 통해 축적한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알아채고 거란군이 고려로 내려오는 길목에 쌀 한톨도 남겨두지 않고 폐허로 만들어버려 거란군의 군수를 망가트린다. 즉 쉽게 말해, 방어하는 고려가 거란군에 손에 들어가면 안되는 물자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이른바 '청야작전'을 쓴 것이다.

 

2) 고려 현종은 거란의 2차 침입때와는 달리 개경을 수비할 수 있는 방어태세를 만들어놨을뿐 아니라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개경 수비에 앞장섰다. 

 

3) 김종현 장군이 이끄는 기병의 끈질긴 추격이었다. 

 

이같은 이유들로 인해 소배압은 당황한 나머지 패배의 위기감을 느끼고 퇴각을 선택한다. 

 

귀주대첩
귀주대첩

4. 소배압의 뒤를 치다 

개경을 포기한 소배압이 요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북으로 올라가자 김종현은 현종을 지키려 개경에 입성한 후 곧바로 현종의 명을 받아 소배압의 군대를 쫓아 북쪽으로 향한다. 

 

이후 소배압의 거란군이 귀주성 앞, 귀주의 평야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을 다시 만나 그야말로 대전을 벌인다. 고려군의 수적 우세와 잇따른 패배로 사기도 떨어져 있던 거란군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동북아 최고의 군사력을 입증하듯 전투는 치열했다.

그런데, 이때 때마침 귀주 평야에 도착한 김종현이 고려군 1만을 이끌고 소배압의 뒷통수를 치니 이때부터 치열했던 두 진영간의 전투가 고려의 우세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여기에 바람마저 고려군의 진영에서 거란군 방향으로 불기 시작하면서 거란군은 차츰 그 힘을 잃어간다. 

 

이후 거란의 군대는 그야말로 고려군에게 분쇄되어 철저하게 패배하니 10만의 군대 중 살아간 군사가 몇 천에 불과할 정도로 거란군은 대패를 하게 된다. 이름하여 1019년 귀주대첩이다. 

5. 김종현 장군의 남은 기록 

이 같은 승리에도 사실 우리는 김종현 장군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귀주대첩 이후 1019년 예부원외랑 임명, 이후 12년이 지나 현종의 아들 덕종이 왕위에 오른 1031년 우간의대부, 1032년 우산기상시 정도로 관직에 임명된 것 이외에는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종현 장군,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은 인물이지만 분명한 것은 보병위주의 고려군에서 기병을 이끌어, 당시 동북아 최강의 정예대군과 맞서서 싸워 이긴 귀주대첩의 영광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짧은 몇줄로 김종현 장군에 대해 추측하는 것이 아쉽지만 꼭 잊지말고 그 공훈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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