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말단관리에서 왕의 장인이 된 실존인물 왕가도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4. 1. 2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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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관리에서 왕의 장인이 된 실존인물 왕가도 그는 누구인가? 

고려거란전쟁에서 현종의 또 다른 구세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왕가도(이자림)이다. 서경의 말단 관리로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기 어려운 신분이었지만 이후 현종의 공신이자 덕종의 장인으로 이름을 떨친 왕가도 그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을까?  

1. 서경의 하급 관리에서 김훈,최질의 난을 막을 때까지

고려 왕가도

 

왕가도는 본래 청주 이씨의 호족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본래 이자림이다. 그가 언제 출생했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첫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성종 때 문과에 급제 하여 서경에서 장서기(문장을 쓰는 지방 관직)로 소박하게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서경에 있던 강조가 난을 일으켜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나 심지어 거란의 2차 침입이 있었을 때도 딱히 그의 활약상은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가 역사속에서 주목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게 된 것은 바로 김훈, 최질의 난 때문이다. 

 

- 김훈 최질의난 (1014. 11. ~ 1015. 3. 약 4개월)

 

2차 거란 침입을 막아내고 뒷수습을 하며 거란의 또 한 번의 침입을 막아내야 하는 현종은 다시 한 번 예기치 못한 반란이라는 위기를 맞는다. 

반란은 김훈과 최질로 이들은 2차거란침입을 막아내는데 공을 세우며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하나 같이 거란군에 맞서 승리를 했던 인물들이었지만 공에 비해 대접을 못받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여기에 당시 고위문관인 황보유의, 장연우가 신하들에게 줄 월급이 없자 군의 땅을 빼앗아 월급을 주려 한 것에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군대의 땅을 함부로 빼앗아 문신들의 월급을 가져가려 한 것은 나라를 구해낸 무관에 대한 철저한 무시였고 현종 역시 이를 알고도 넘어간 것에 무관들이 폭발한 것이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황보유의 장연우 등을 채찍으로 때려 반죽음을 만들고  유배보냈으며 무관들이 문관까지 겸하게 만들고 권력을 장악한다. 아무 힘이 없었던 현종은 이를 두고만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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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가도가 난을 막아내다 

 

김훈 최질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왕가도는 분노하였는데, 당시 그는 능력을 인정 받아 지금의 함경도 방어사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왕가도는 나름의 계책을 세운 후 현종을 찾아 '그 옛날 한나라 고제가 운몽에서 놀이한 고사를 아십니까'라고 넌지시 자신의 계책을 현종에게 말한다. 이는 한나라 유방(고제)이 당시 제후들을 몰살시킬 때, 연회를 만들어 그들을 다 불러 모은 다음 제후들은 물론 초왕 한신을 체포 한 일화를 말한 것이다. 즉 쉽게, 말해 연회를 열고 김훈 최질을 비롯한 무관들을 불러 모은 후 척살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현종은 이를 듣고 왕가도를 통해 바로 실행에 옮겼고 1015년 3월 무신들을 서경의 장락궁으로 초대해 연회를 베푼 후 그들을 술에 취하게 한 후 한 번에 습격하여 김훈, 최질과 그자리의 무관들을 참살하였다. 이렇게 다소 허무하게 김훈 최질의 난은 끝나게 된다.

 

여튼 이 난을 제압한 후 왕가도는 현종의 최측근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2. 왕가도 '왕'씨 성을 물려 받고 공신이 되다 

김훈최질
고려거란전쟁 김훈 최질의 난

 

김훈 최질의난을 막을때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이자림이었는데, 1022년 현화사비에 채충순이 쓴 뒷면에 '이가도'라는 이름이 나온다. 본래 이름이었던 이자림이 이가도로 개명한 것이다. 


여튼 이가도는 조정에서 나름의 입김을 가지게 되었고 내사문하성(고려 최고의 의결기관)에서 임원격인 참지정사 자리에 오른다. 이후 개경 외성 건설의 중책을 맡게 되어 황보유의, 황주량 등 당대의 공신들과 함께 나성을 쌓는다. 이때의 공을 인정하여 현종은 그에게 '왕'씨 성을 부여하니 그의 이름이 왕가도가 된다. 

 

여기에 왕가도의 장녀가 현종의 후궁으로 들어가면서 조정의 중심이 된다. 


- 왕가도 덕종의 장인이 되다 

 

현종이 죽고, 그의 두번째 딸이 덕종과 결혼하면서 왕가도는 외척이 된다. 이후 문하시랑 자리에 오르니 당대의 권세가 왕가도에게 있었다. 

당시 덕종때는 이미 거란의 3차 침입을 완벽하게 박살내면서 고려의 위상이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올 정도로 강해졌던터라 왕가도는 거란에 보수적이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에 덕종 역시 이 같은 외교 노선을 고수하며 거란에는 강경책을 펼쳤다. 여기에 거란에게 넘어간 의주 땅을 빼앗기 위해 출진까지 강행하려 했으나 온 조정이 반대하면서 덕종 역시 차마 여기까지는 허락하지는 않는다. 

이후 왕가도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명분 삼아 조정에서 은퇴하여 고향 청주로 떠났고, 이후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었던 현종의 묘에 배향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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