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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사립학교장 고려 대표 유학자 해동공자 최충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3. 12. 1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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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사립학교장 고려 대표 유학자 해동공자 최충 그는 누구인가?

고려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동방의 공자라 불렸던 최충, 교육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바로 최충이다. 고려거란전쟁에서 등장은 물론 고려의 문신가문의 전성기를 열었다고 알려진 천재, <한국을 빛낸 위인 100명>의 노래에도 해동공자라는 별명으로 등장하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1. '최충' 천재로 조정에 등장하다

고려거란전쟁 최충
고려거란전쟁에서 등장한 최충

 

해주 최씨의 시조였던 아버지 최온의 아들로 태어난 최충은 984년(성종 3)에 태어났다. 고려는 4대왕 광종 이후 과거제도를 실시하는 등 통치이념을 기존의 불교에서 유교를 중시하는 사회로 변화하면서 성종 역시 지방의 수많은 인재를 데려오기 위해 지금의 국립대학교인 국자감 등을 설치하고 유학 교육에 박차를 가한다.

또한 이때부터 지방 곳곳마다 향교(서원) 등이 설치되어 지방 인재들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였고 과거 급제를 한 인재들을 조정에서 우대하면서 지방의 향리 출신들이 적극적으로 조정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과 함께 등장한 사람이 바로 '최충'이다. 

최충이 조정에 등장하기 전까지의 유년 시절 등을 역사속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향리 출신이었던데다가 당시 과거제를 통해 조정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분명 수재였을 것이다. 최충이 시험을 보기 1년전인 1004년(목종 7)에 과거법을 살펴보면 지금의 고사나 수능처럼 단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날을 거쳐 시험을 봐야 했는데, 그런데 이러한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것은 그가 얼마나 똑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최충' 의 벼슬생활

최충의 초상화

 

1005년 벼슬에 처음 들어온 최충은 운도 좋았다. 그를 선발한 것이 최항이었는데 최항이 당시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하면서 최충 역시 그 덕을 본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고려사회는 자신을 뽑아준 사람과 끈끈한 유대감을 갖는 관행이 있었는데, 최항이 현종 즉위에 있어 도움을 주면서 나름의 기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최충을 잘 끌어주었다. 

 

또한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고려군의 행영수제관을 지냈고 이후 우습유, 보궐, 한림학사, 예부시랑 등 문신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한 1026년에는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 역할을 맡아 고려의 인재를 뽑기도 했으며 1030년에는 현종의 왕자들을 교육하는 스승자리인 태자유우덕을 역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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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죽자 그의 치적을 찬양하는 표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덕종, 정종 때에도 그 능력을 인정 받아 승승장구하면 문하시랑에 등용되었고 문종 때에 이르러 1047년 고려 신하 최고의 자리인 문하시중에 올라 세금과 관련된 법, 약자를 보호하는 구휼법, 중죄인을 다스릴 때 3인 이상이 재판을 할 수 있는 삼원신수법 등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그 당시로는 대단한 법들을 만들어 낸것이다.

 

문종은 최충을 가장 신임했다. 자신이 실수하거나 편견을 가질 때 최충이라면 객관적으로 지적해주고 옳은길로 의견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종은 예외를 인정하고 인품과 실력을 중시했지만 최충은 원칙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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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은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돌봤을뿐 아니라 고려 경계 지역인 서북지방의 백성들의 부역을 낮추었으며 고려에 붙잡혀 있던 동여진 추장 염한을 돌려보내는 건의를 올려 고려는 외교적으로도 안정사회에 접어든다. 1053년 그가 70살을 앞둔 무렵 최충은 조정에서 내려가겠다며 은퇴를 선언했으나 문종은 이러한 최충을 붙잡고 이미 최고의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그 벼슬을 더 높여주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걸 봐서 최충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최충 역시 문종의 간곡한 바람 때문에 1055년 결국 국법으로 정해진 70살이 되어서야 벼슬자리에서 내려왔지만 그 후에도 나라의 대사가 있을 때면 문종은 사람을 보내 그의 혜안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3. '최충' 의 은퇴 후 생활 - 고려 교육에 매진하다 

최충이&nbsp; 썼다는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비문

 

마침내 정계에서 은퇴한 최충은 고려의 교육을 위해 집에서 젊은 인재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인재들이 최충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찾아왔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당대 최고의 교수가 무료로 가르침을 주고 또 고시도 한번에 붙게 해준다는데 아마 요즘 같아도 엄청난 구름 인파가 몰렸을 것이다. 

여튼 이에 최충은 본격적으로 유학 문하생들을 양성하고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인 9곳의 학당, 즉 구재학당을 건립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사립학교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구재학당은 고려사에서 표현하길 당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학교가 되면서 마치 요즘시대처럼 학벌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한 최충에게 배운 제자들이 출세를 하기 시작하면서 고급관료  출신들이 사립학교를 세우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 개경에 12학당이 생겨났고, 이를 고려의 사학12도라 불렀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는 최충의 '문헌공학도'로 그 문하생만 수백에 이르렀는데, 그러자 사람들은 최충을 두고 유학을 번성케 하였다 하여 중국의 공자로 비교 하였고 해동공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3. '최충' 의 죽음과 해동공자

 

최충은 은퇴하고 15년 동안을 오직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썼으며 그의 나이 85세인 1068년인 (문종22)에 눈을 감는다. 당시 85세면 엄청난 고령이자 장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도 강단에 서서 제자들을 양성했다고 한다. 

 

최충은 해동의 공자라 불리며 그야말로 고려 전기의 유학의 문을 제대로 열어 제쳤으며 본의 아니게 문벌귀족들이 고려사회로 치고 나가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다만 최충의 시문은 물론 그가 쓴 책들은 이후 고려 무신정변 당시 불태워지거나 사라지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당시 문종은 고려거란전쟁 이후 안정적인 국방과 외교를 바탕으로 중앙집권화 성공은 물론 고려의 치세와 전성기를 만들어 낸 왕이었다. 그리고 그 문종의 치세는 대부분 최충의 손을 거쳐 완성되는데, 문종은 최충을 아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종은 최충에게 너무 고마운 나머지 최충이 더 올라갈 벼슬이 없자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벼슬을 내리고 승진시켰는데, 최충이 죽자 문종은 벼슬하는 자손들에게 경사를 남겼다고 표현할 정도로 최충의 가문까지 챙겼다고 한다. 

 

(사)해동공자 사단법인 최충 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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