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비운의 왕 고려 2대 왕 혜종, 그는 왜 왕권을 잃었나?

윤여시 2024. 1. 22. 22:16
반응형

비운의 왕 고려 2대왕 혜종, 그는 왜 왕권을 잃었나?

후삼국시대를 평정하고 통일신라를 무너트리며 마침내 제국을 완성한 고려의 태조 왕건, 그리고 그의 적자로 왕위에 오른 2대왕 혜종..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려 역사속에서 2대왕 혜종의 존재감은 미약한 편이다. 그는 왜 가장 왕권이 강할 제국의 초창기 존재감이 미약한 왕이 되었을까? 그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보자

 

고려 2대 왕 혜종

1. 고려 2대왕 혜종의 출생과 위협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함에 있어 가장 큰 기반은 바로 호족 덕분이었다. 왕건은 호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혼인을 통해 무려 29명의 후궁에게서 25남 9녀라는 자녀를 얻게 되는데, 요즘 같은 저출생 시대에 기가 막힌 자녀의 수라 할 수 있겠다. 

 

여튼 왕건이 있을때야 이들이 분란이 없었지만 사실, 왕위 계승에 있어 형제들간의 권력다툼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 역사 속에서 적장자는 왕권을 물려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기에 이 수많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태어난 장남 혜종(태자 무)은 왕건 다음의 왕좌의 주인으로 낙점되었는데, 참고로 혜종은  912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제 2비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이다. 

- 혜종의 출생 이야기 

궁예의 신하로 있던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우연히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게 된다. 이때 왕건은 오씨와 동침을 하게 되는데 출신이 미천한지라 임신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정액을 돗자리에 배출하게 되는데 오씨가 이것을 흡수하여 임신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더니 아이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는 후에 혜종의 왕위를 반대했던 세력들의 낭설로 이 이야기만 봐도 얼마나 혜종이 겪었던 수모가 컸는지 알 수 있다. 

 

당당히 장남임에도 그는 왕위를 이을 태자 책봉에 있어 쉽게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장화왕후 오씨가 나주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차에 유력 가문인 제 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태자 태(훗날 정종)을 출산하면서 호족들간의 왕위 계승권을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장화왕후 오씨에게 전해진 왕건의 자황포(왕이 입는 옷)

왕건은 태자 무가 비록 장자지만 호족의 눈치를 어느정도 봐야 했기에 태자로 세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장화왕후를 위로하기 위하여 낡은 상자에 자황포를 넣어서 전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장자를 왕위에 올리지 못하는 것을 뜻했다. 

자황포를 받은 오씨는 당시 대광(재상)자리에 있던 박술희를 불러 왕건의 뜻을 전했다. 이에 박술희는 장화왕후를 통해 자황포를 자신에게 보여준 왕건의 뜻이 박술희 자신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아채고 박술희는 신하들 사이에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왕건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반응형

호족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태자에 책봉된 혜종이었지만 왕건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와 그의 호족 세력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반발하였고 왕건은 충주 유씨 가문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가문에 벼슬을 내려주는 한편 신명순성왕후를 3번째 부인에서 정식적으로 제 3비로 받아들인다. 

 

그러는 가운데 왕건은 태자에게 힘을 몰아주고자 박술희를 후견인으로 선정하고 경기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키우고 있던 왕규의 딸을 태자의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하고 청주의 대호족 김긍률의 딸을 세 번째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왕건의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자신이 살아 있는한 태자의 권력은 어느정도 커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때에도 충주 유씨 역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지금의 평양이자 당시 고려의 제 2의 수도였던 서경세력 평산 박씨 박수경, 왕건의 사촌 왕식렴 세력과 힘을 합해 그 세력은 혜종을 뛰어 넘을 정도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보보경심려 혜종
보보경심려의 혜종

2. 혜종의 즉위와 끝 없는 왕권 위협 그리고 죽음

마침내 왕건이 943년 세상을 떠나자 혜종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충주 유씨 세력과 3비 신명순성왕후의 그 아들 왕요(정종), 왕소(광종)는 혜종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자 혜종은 박술희와 왕규를 방패 삼아 이를 막으려 한다. 

 

그러나 왕요와 왕소가 서경세력과 힘을 합치고 자신의 딸도 혜종의 부인인데 박술희와 왕규에게만 의존하는 것에 불만이 있던 청주 김긍률, 견훤의 사위이자 왕요의 장인 박영규는 물론 박수경, 수문 형제들까지 왕요에게 힘을 합치면서 혜종은 바람앞의 등불처럼 왕권이 위협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말년에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에 침실을 옮겨가며 지낸다. 

 

그러자 혜종의 장인인 왕규는 충주유씨 세력과 왕요 형제가 반란을 꾀한다고 고변하고 역모세력이라고 몰아 붙였지만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삼게 하여 화해의 제스쳐를 취한다. 그러나 왕요 일파는 끝없이 왕권 위협을 가속화하였고 왕위에 오른지 내내 눈치만 봤던 혜종은 병을 얻어 쓰러졌다가 945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재위에 오른지 불과 2년만의 일이었다.  

 

태조왕건 혜종
태조왕건 혜종

3. 혜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 

혜종은 왜 갑자기 죽었을까? 혜종이 죽고 난 후 박술희와 왕규는 어찌되었을까?

 

일단 <고려사>를 먼저 보면 혜종의 병명은 나오지 않을뿐더러 그가 항상 왕권의 위협을 받아 호위병을 데리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에서는 이 같은 이유가 생뚱맞게 모두 혜종의 측근인 왕규 때문이라고 알리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그 증거로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이자  태조 왕건 16비의 아들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자객을 활용했다거나 귀양을 간 박술희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승자가 쓴 것이라 볼 때 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첫 번째, 왕에게 자객을 보냈다면 이는 왕규가 아니라 왕요의 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왕규는 혜종이 죽으면 자신의 기반이 상실되는 것일뿐 아니라 자신의 외손자 광주원군이 클 때까지 오히려 혜종이 버텨줘야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둘 째,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이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왕규는 본래 함씨였지만 왕건의 말년에 총애를 받아 왕씨를 하사 받았으며 박술희와 함께 혜종을 잘 보필하라는 유언을 들었던 입장이었다. 따라서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는 그나마 같은편인 박술희와 갈라섬을 의미했고 군사력도 있지 않았던 자신에게 이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또한 자신을 쫓아내고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신하에게 혜종이 끝까지 의지하면서 함께 갈일은 더더욱 없었다. 

 

셋 째, 명분이 없다. 광주원군은 당시 적통도 아니었거니와 명실상부 왕요가 버티고 있었고 왕건의 16비인 머나먼 왕자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이는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도 어긋날뿐 아니라 도저히 호족들을 설득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왕규가 모를리 없었다. 

 

여튼 이후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명분으로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 <고려사>는 정작 왕규가 반란을 도모했다고 적시해 놓은 것이 아니라, 도모하려 했다라는 애매모호한 기록만 남겨 놓았다. 이는 왕규가 반란군이 아니라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서경세력이 일으킨 반란임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이미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으로 들어왔을 때는 혜종은 병사했거나 살해당한 이후였고, 왕요 일파는 자신을 평소 반대했던 세력을 이 날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 이때 유배를 떠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술희로 당시 군사권을 지니고 있던 박술희를 왕요 세력은 유배 보냈다가 생뚱맞게 세력을 잃은 왕규가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는다는 기록을 남겨둔다.  

 

여기에 왕규의 무리 300명을 처형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조정대신들이 왕요의 부당한 행위에 반발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혜종 역시 자신의 적장자 아들이 있는 상태였던지라,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동생 왕요를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은 것만봐도 혜종이 과연 병사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점, 왕요와 서경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박술희와 왕규 일파를 제거한 것을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이 신뢰했던 면천 박씨의 시조 박술희 그는 누구인가?

태조 왕건이 신뢰했던 면천 박씨의 시조 박술희 그는 누구인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것은 태조 왕건이지만 이는 그를 뒷받침하는 호족들과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왕건

yoosi0211.tistory.com

 

제국의 아침 혜종
제국의 아침 혜종

4. 혜종의 기록이 허술한 점

그렇다면 아무리 승자의 기록으로 쓰인 <고려사>라지만 왜 이렇게 허술한 점이 많을까? 왕요 일파가 역사왜곡을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도 있다. 

 

고려에서 실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로 거란의 2차 침입때 궁궐이 모두 불타면서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도 모두 사라졌다. 다시 말해 역사자료가 없어진 것이다. 1013년 9월 현종은 이러한 사료의 복원을 위해  '칠대실록'을 쓰라고 명한다. 

 

그러나 당시 사초가 모두 사라졌던지라 칠대실록 편찬이 난관에 부딪혔는데, 해서 이를 주도한 인물이었던 황주량은 나이가 많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이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안그래도 승자들에 의해 왜곡된 이야기들이 자료도 없던지라 헛점이 많게 실리면서 혜종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이후의 그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허술하게 남겨진 것이다.

 


고려 2대 왕 혜종, 후삼국을 통일했던 왕건의 적장자였지만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던 그였기에, 더욱 안타깝다. 단지 가문이 힘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동생들에게 밀렸던 혜종을 기억해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