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고려 무신정변의 시초! 월급을 못받아 화난 무신 김훈 최질의 난

윤여시 2024. 2. 4. 00:21
반응형

고려 무신정변의 시초! 월급을 못받아 화난 무신 김훈 최질의 난

고려의 무신정변 하면 고려 의종 때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에 일어난 무신들의 반란을 기억하기 쉽겠지만 사실 그보다 150여년 전에 가장 먼저 일어난 무신정변이 있었다. 바로 고려 현종 때 장군 김훈 최질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 그것이다. 가뜩이나 거란의 침입으로 바람 앞에 등불 같았던 고려의 국운이었는데, 내부의 반란까지 일어나니 현종의 입장에서는 아찔 했을 법하다. 과연 어떠 반란이었을까? 

1. 김훈 최질의 난 발생 배경 

김훈 최질의난

 

- 김훈과 최질은 누구인가? 

고려 거란의 2차전쟁이 끝나고 전란 복구 작업과 함께 거란의 3차 침입의 전운이 감돌던 1014년 11월, 현종에게는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니 바로 김훈, 최질이 이끄는 무신들의 반란이었다. 

 

먼저 김훈과 최질은 거란전쟁에서 나름 전공을 세우며 고려를 위해 목숨 바친 인물들로 당시 고려의 상장군 자리에 올라 있었다. 

2차 거란전쟁 때 김훈은 기습공격을 통해 거란군을 잠시나마 퇴각시켰던 공이 있었고, 최질은 통주에서 끝까지 항전하며 지켜낸 인물이었다. 이를 봤을 때, 그들이 고려의 충신이 아니었다거나 자신의 사욕을 챙기는 인물이었다기 보다는 당시 고려의 장수로서 꽤 든든한 인물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막상 목숨 바쳐 싸웠던 고려 거란의 2차 전쟁이 끝난 후, 최질은 자신들의 공에 비하여 문신들에게 대우를 받지 못해 불만이 내재 되어 있었고 이는 다른 무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반란을 일으키게 된 계기

무자비한 거란군에 목숨 바쳐 싸워가며 동료였던 장군 양규 등이 목숨을 잃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던 무신들의 입장에서는 도망치기 급급했던 문신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대다가 여기에 더해 자신들보다 훨씬 더 대우를 받자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활활 타오르기 직전인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고려 조정의 문신을 대표하는 황보유의와 장연우가 군인들이 소유한 토지를 빼앗아 신하들(문신)의 모자란 월급을 메꾸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여기에 더나아가 현종마저 이를 쉽게 생각하였으며 문신들을 제지하지 않고 쉽게 허락해 주었다.

 

생각해봐라 싸우지도 않는 문신들이 자신들의 월급을 챙기기 위해 무신들의 재산마저 빼앗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공에 대한 부분은 생뚱맞게 문신들이 다가져가고, 여기에 무신들은 거란의 3차침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벌이고 있는데, 그와중에 자신들의 땅을 빼았다니 안그래도 불만이 쌓여 있는 무신들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라마 천추태후 김훈 최질
드라마 <천추태후>

- 반란 과정 

상장군 김훈과 최질은 1014년 11월 마침내 칼을 빼들고 군사를 일으켜, 삽시간에 궁에 난입하고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포박해 귀양을 보내버렸으며 여러명은 매질하여 그 자리에서 죽이는 반란을 일으킨다.

 

이후 김훈과 최질은 놀란 현종을 찾아가 말하길,

 

'황보유의 일당 등이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니 이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하며 현종에게 강하게 청한다. 

이에 현종은 막상 두 장군이 군대를 서슬 퍼렇게 끌고오니 막상 어찌할 수가 없는지라 그들의 요구대로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귀양 보낸다. 

 

이후 최질과 김훈은 더 나아가, 

'상장군 이상의 무관은 문관도 가능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겸직을 요청하니, 이는 곧 그동안 문신과 무신이 구분되어 차별받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무신들의 반란인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현종은 자칫 자신마저 쫓겨날 수 있는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허락하였는데, 김훈과 최질은 한 발 더나아가 조정의 조직까지 개편하면서 한순간에 조정의 권력을 잡게 된다.

반응형

- 반란의 결말 

기세 등등했던 김훈과 최질의 반란은 1015년 3월, 허무하게 끝나게 된다. 불과 4개월 천하였다. 그들의 반란이 실패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당시 화주방어사였던 이자림(후에 왕가도)이 김훈과 최질의 반란 소식에 분개하여 현종을 몰래 찾아 올린 계책 때문이었다.  

 

이자림(후에 왕가도)이 말하기를,
'한나라 고조(유방)의 고사를 기억하십니까?'  여기서 한나라 고조의 일화는 당시 기세등등하던 제후들을 한자리에 모아 참살한 고사를 말하는데, 쉽게 말해 김훈과 최질 등 모든 무신들을 술자리로 초대한 후 주살해야 한다는 계책을 올린 것이다. 

 

 

말단관리에서 왕의 장인이 된 실존인물 왕가도 그는 누구인가?

말단관리에서 왕의 장인이 된 실존인물 왕가도 그는 누구인가? 고려거란전쟁에서 현종의 또 다른 구세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왕가도(이자림)이다. 서경의 말단 관리로 역사에 이름

yoosi0211.tistory.com

 

이에 현종이 계책을 받아들여 1015년 3월, 무신들을 평양의 장락궁에 불러 모은 후 연회를 베풀고 그들을 모두 술에 취하게 한다. 이후 군사를 보내 이미 술에 취해 있던 김훈, 최질 등을 그자리에서 죽이고 반란의 주동자들을 모조리 잡는다. 이렇게 약간 허무하게 고려의 제 1차 무신정변이 끝나게 된다. 

김훈 박진 최질

- 현종의 반란 수습과 의의

현종이 애초에 반란의 명분을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군은 성군인지라, 반란에 분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사정을 파악하고 대처한다. 먼저 당시 왕에 대한 반란은 삼족을 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그들의 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지 않고 단지 벼슬길만 못 올라오게 막는다. 

 

또한 무신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고 대우를 점검하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성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목종이 강조의 난으로 쫓겨 났고 자신도 위험했음에도 대처를 현실적으로 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현종은 무신들뿐 아니라 병사들에게도 포상을 주면서 떨어질 수 있는 군의 사기를 올리는데 집중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의 명예도 어느 정도 복원될 수 있었다.


고려 역사에서 무신정변은 사실 현종 때 일어난 김훈, 최질의 반란이 원조격이라 할 수있다. 150년 이후 일어난 정중부의 무신정변과 비슷하게 무신들이 자신들의 처우에 대한 불만과 문신들에 의한 차별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종은 성군답게 자칫 왕의 자리가 위협 받을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이를 아주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무신들의 대우를 격상하는데 집중하였고, 거란의 3차 침입을 대항하기 위해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지 않으려 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후에 이같은 현종의 뜻이 잘 전해지지 않아 고려는 다시 한 번 무신들의 반란이 휘몰아치게 되지만 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