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고려 현종의 둘째 아들, 고려 전성기의 기틀을 만들어 낸 10대 왕 정종

윤여시 2024. 1. 16.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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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의 둘째 아들, 고려 전성기의 기틀을 만들어 낸 10대 왕 정종

고려 현종의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와 치세로 인해 고려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어 그 뒤를 이은 장남이자 고려 9대왕 덕종이 나라 안과 밖 모두 치세로 다스리며 고려는 더욱더 부강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덕종은 왕위에 오른지 4년이 채 되지 않고 세상을 떠나니, 그 뒤를 이은 왕이 바로 덕종의 동생이자 현종의 차남인 고려 10대왕 정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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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10대 왕 정종 왕위에 오르다

정종은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현종의 차남이다. 1018년 태어났으며 이름은 형이다. 1034년, 그의 형 덕종이 19세의 나이로 죽자 그 뒤를 이어 받아 왕위에 오르니 불과 17세였다. 고려 3대왕 정종과 그 발음은 같지만 한자와 뜻은 다르다. 

고려 10대왕 정종의 무덤

 

정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개경과 서경에 팔관회를 열고 대사면령을 내려 백성들의 인심을 살폈다. 또한 해동공자라 불렸던 최충을 비롯하여 여러 인재를 등용하여 조정을 개편하는 등 17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국정 운영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아버지 현종과 덕종 기간 동안의 고려 안정화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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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과의 관계

고려 현종 때부터 고려의 국운을 좌우하는 건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거란과의 관계였다. 현종대에 거란의 3차침입에서 거란군을 궤멸시키면서 고려는 평화로 가는 문을 열었고, 국방은 안정되어간다. 오히려 덕종대에 이르러서는 거란에 강경책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종 역시 국방력을 바탕으로 형의 뒤를 이어 거란과의 강경책을 펼쳐나간다.

 

먼저 평북 창성이라는 북방에 성을 쌓아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덕종대에 시작된 천리장성 축조까지 지속시켜 국방을 더욱 강화한다. 이에 거란에서는 강하게 반발하며 장성 축조 중지와 국교 정상화를 요구했는데, 고려는 이를 단언지하 거절하며 자국의 국방을 위해 성을 쌓는 것이고 거란이 무력으로 차지한 압록강 주위의 땅과 납치해간 신하들을 돌려보내면 국교는 정상화 될 것이라고 강하게 말한다. 

 

고려의 이 같은 반응에 거란은 압록강에 해군을 보내 무력시위를 펼치는데, 이것 역시 고려가 무시하자 결국에는 1038년 4월, 억류중인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양국의 외교 관계는 정상화 된다. 역시 외교는 힘을 바탕으로 펼칠 때 진가를 발휘한 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드러낸 것이다. 

 

고려는 상서좌승 김원충을 거란에 파견하고 그 해 8월부터 거란의 연호를 사용한다. 이때부터 고려 거란은 대치상태와 전쟁상태가 종결되고 거란이 멸망하는 13세기까지 쭉 평화기가 찾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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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리장성
고려 천리장성

 

- 천리장성의 완성

평화가 지속된다 하더라도 정종은 방심하지 않고 천리장성 축조사업을 계속하였고 1044년 마침내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한다. 천리장성의 완성을 통해 고려는 거란, 여진과 같은 북방 오랑캐들을 막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북방문화가 내려와 고려 문화를 해칠 수 있는 부분도 막아낼 수 있었다. 

2. 정종, 이른 나이에 눈을 감다 

국방력이 강화되고 고려 경계가 안정되자마자 정종은 국내로 눈을 돌려 많은 것을 바꿔나간다. 1039년 노비종모법을 제정하였는데, 여기서 노비종모법이란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른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또한 1045년 악공은 물론 말단 잡류는 물론 불충, 불효의 전과가 있는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고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마련하고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는 등 당시 사회 분위기에 맞는 제도들을 바꿔나간다. 

 

그러나 정종은 얼마가지 못해 몸이 병약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을 살피다가 1046년에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된다. 이후 그의 이복동생이자 현종의 또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재위 11년 만의 일이었다. 

 

<고려사>에서 이제현은 정종을 평가하길, '거란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그들을 감동시켰으나 이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책략이었다. 정종은 선대왕의 유업을 계승하여 국가를 보전하였다' 라고 평가했다.


 

고려 전성기의 기틀을 만들어낸 정종은 그 뒤를 이은 문종의 치세를 만들어낸 밑바탕이었다. 11대왕 문종은 고려의 마지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왕이었다. 바로 그 전성기로 향하는 밑바탕을 국난을 극복한 현종과 그의 장남 덕종, 그리고 차남 정종이 그렸던 것이다. 11년이라는 기간 동안 고려를 다스린 10대 왕 정종 ... 왜 훌륭한 왕들은 빨리 죽었는지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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