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후삼국 전세를 바꾼 승리를 안겨준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4. 2. 1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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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전세를 바꾼 승리를 안겨준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 그는 누구인가?

조선 후기 세도정치 하면 떠오르는 가문이 있을 것이다. 바로 조선의 명문 가문중 하나였던 '안동김씨'이다. 모든 권세를 틀어쥐었던 이 가문에도 처음 시작을 알린 시조가 있었다. 그는 바로 후삼국 패권에서 견훤에게 계속 패배하던 태조 왕권에게 승리를 안겨준 인물 중 한명 바로 김선평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태조 왕건 김선평

1. 안동김씨 김선평의 족보

김선평은 신라 제52대 왕 효공왕의 아들로 서기 901년 태어났다. 효공왕이 죽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1세에 불과한 관계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전해지는데, 하마터면 망해가는 신라의 불우한 왕으로 있을뻔 했다. 그러고 보면 안동김씨는 신라 황실의 핏줄을 이어 받은 가문으로도 볼 수 있다.   

 

그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서기 926년, 경애왕 때에 이르러 25살의 나이로 고창성주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이때 고창은 지금의 안동이다. 그리고 4년뒤, 후삼국의 패권이 견훤의 후백제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전쟁이 발생하니 바로 그 고창전투였다.

2. 김선평과 고창전투 

- 고창전투 배경

고창전투가 일어나기 전만 해도 당시 후삼국 시대는 견훤의 시대라 해도 무방했다. 신라로 쳐들어가 황궁을 점령하고 왕을 바꾸었으며, 이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을 전멸시키면서 견훤은 후삼국의 패자로 등극한다. 여기에 견훤은 멈추지 않고 경상도에서의 영토를 점차 넓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929년 12월 견훤은 경상도 거점 중에 고려 최후의 보루 중 한 곳인 고창 땅 점령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고창을 완벽하게 포위하였다. 이때 고창에 남아있던 고려군은 3천명으로 후백제군에 포위당한 상태라 고려로써는 가만히 놔두면 고창은 물론 모든 병사를 잃게 생긴 판이었다.

 

이때 왕건은 섣불리 고창으로 들어갔다가는 자칫하면 공산전투처럼 기다리고 있던 후백제군에게 패배할까봐 안절부절만하고 있는 상태였고 신하들에게 물으니 홍유와 공훤 같은 장수들이 고창을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유금필은 강력하게 출전을 건의하며 반드시 고창을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하였고 이에 왕건은 죽령을 넘어 고창전투를 시작한다.  

- 고창전투 전개 

고창전투는 호족들의 전쟁이었다. 왕건이 죽령을 넘어 고창을 향할 때 아주 기쁜 소식이 하나 도착하는데 이는 지금의 경상북도 진보면의 재암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 장군 선필이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온 사실이었다. 사실 경북 일대를 지키던 홍술 장군이 전사한 뒤 당시 경북 지리에 밝았던 장군이 없었는데 선필이 넘어오면서 고려는 쉽게 고창의 지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의 신라 호족이었다. 이들 역시 군을 이끌고 고려 군에 가세한다. 왕건은 이들과 함께 병산에 진을 쳤고 견훤은 불과 500보 정도 떨어진 석산에 진을 친다. 

 

자신만만했던 견훤이 먼저 왕건의 군대를 습격하니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는 3~4일간 쉬지 않고 계속되는데, 초반만 하더라도 견훤이 우세한 듯 보였지만 김선평을 비롯한 신라의 호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유금필의 정예 기병이 후백제군을 포위하면서 급반전이 일어난다.

 

고려는 후백제군을 거의 전멸 시켰고, 견훤은 목숨만 겨우 부지해 도망갔으며 이때 후백제의 병력은 8천명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를 통해 태조 왕건은 삼국의 패권을 다시 거머질 수 있었으며, 이후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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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삼태사 묘
고려 삼태사 묘

3. '후' 안동 김씨의 시작

엄청난 승리에 너무나 기뻤던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공을 세운 호족들에게 그야말로 극찬을 하며 공신 반열에 올려버린다. 보통 공신은 전투에서 한 번 공을 세웠다고 될 수는 없고 나라를 구할 정도가 되어야 될까말까인데 왕건이 얼마나 이 승리를 기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이 승리로 고창의 호족들인 김선평, 김행, 장정필에게는 각각 안동을 배경으로 하는 성씨를 하사했으며 안동 땅을 식읍으로 내린다. 김선평은 안동 김씨, 김행은 권씨로 바꾸어 안동 권씨, 장정필은 안동 장씨가 된다. 이들은 더나아가 3태사라 불리게 되었는데, 여기서 태사란 왕의 스승을 뜻한다. 지금 안동에는 태사묘라 하여 왕건이 이들에게 내린 하사품(허리띠, 신발, 관모) 등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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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해도 안동은 고창이라 불렸었는데, 고창전투 이후 고려에서는 편안할 안 安, 동쪽 東 '안동'으로 바꿔 불렀다. 다시 말해 동쪽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고려가 얼마나 안동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겠다. 

Q. 여기서 잠깐, 안동김씨도 2가지로 나뉜다?

안동 김씨는 2가지로 나뉜다. 구분을 위해 나눈  '후'안동김씨, '선'안동김씨가 그것이다. 

'후'안동김씨는 대부분의 안동김씨로 경순왕의 손자였던 김숙승을 시조로 한다. '선'안동김씨는 위에서 말한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로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세도정치를 통해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한 세도정치를 했던터라 그 숫자가 앞서 말한 '후'안동김씨보다는 적다 할 수 있겠다. 


안동김씨, 우리나라의 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성씨이기에 그 뿌리를 살펴본다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안동김씨는 세도정치를 통해 조선조 나라를 흔들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멸망한 뒤,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성씨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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