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두경승 장군! 고려 무신정권, 진정한 무인으로 그가 추앙 받는 이유는?

윤여시 2024. 4. 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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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승 장군! 고려 무인시대, 진정한 무인으로 그가 추앙 받는 이유는?

역사 속, 어느나라나 강한 군대와 무력으로 바탕으로한 쿠데타는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난다긴다 하는 무인들이 오직 권력만을 탐했던 고려 무신정권 시대, 여기서도 그나마 훌륭한 무인의 기개를 지키려 했던 장군이 한명 있었으니 바로 두경승 장군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두경승 장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등장한 두경승 장군

 

1. 무신의 반란속에서도 두경승 장군 초연히 등장하다

1170년, 고려에서는 그간 문신들에 비해 끝없이 차별 받아온 무장들이 개경의 보현원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무신정변이 일어난다. 정변 자체가 초기에는 무신들의 그간 쌓아온 분노로 인해 펼쳐지면서 그야말로 피의 복수극이 고려 조정을 뒤덮었다. 
 
이때 두경승은 당시 왕실을 지키는 친위대였던 견룡군의 장교정도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 경호처의 소위 정도 되는 셈이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사실 그와 같은 하급 장교들도 출세길이 열릴 수 있음에도 두경승은 절대 참여하지 않았다. 다른 무장들의 부대들은 무신정변에 가담하여 약탈과 살육을 벌였지만 두경승은 자신의 맡은바 근무지를 지키며 정변에 가담하지 않으니 그의 휘하 장졸들도 참여하지 않고 임무수행에만 매진했다고 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무신정변의 장본인중 한명인 이의방이 두경승을 선택하여 내순검군지유로 진급한다. 그러나 두경승은 얼마 후, 갑자기 산으로 올라가 숨었지만 이의방이 다시 불러 낭장(고려에서 정 6품 무관직)자리를 맡겼다고 전해진다.
 

2. 두경승 장군 모든 반란을 진압하다 

두경승은 장군으로서도 상당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 김보당의 난

먼저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3년후에 당시 동북면병마사를 수행하고 있던 김보당이 폐위된 의종을 복원하고 무신정변의 주모자들을 척살하겠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였다. 처음 반란의 세가 만만치 않았는데 이때 두경승 역시 참전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운다. 
 
역사에 의하면 당시 이의방의 사촌형이었던 이춘부가 반란 지역의 수령들을 모조리 잡아 잔인하게 죽였는데, 두경승은 이런 이춘부를 제지하여 반란에 참여한 인물들만 조사한 후 징벌하였다고 전한다. 이일을 통해 당시 반란군 지역의 민심 역시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다고 고려사에 전해진다.

- 조위총의 난 

김보당의 난이 있고 1년후인 1174년, 서경의 유수 (지금의 시장 급) 조위총이 이번에도 역시 무장들의 반역과 의종 시해에 대한 분노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서경 주위의 성들이 호응을 하였는데, 고려 조정은 깜짝 놀라 윤인첨으로 하여금 토벌대를 구성하게하여 급파한다. 그러나 이들은 반란군의 계략으로 인해 대패를 하고 만다. 유일하게 동북면으로 향한 두경승만이 의주성을 점령하고 반란에 참여한 의주성주를 척살하여 개경으로 보낸다. 
 
두경승은 이 조위총의 난 토벌작전에서 레전드를 쓴다. 적의 기습에도 두경승은 홀연히 활을 쏘아 적들을 패주시키기도 하였고,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지 않았다. 고려사에서는 두경승이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마치 초목이 바람에 쓰러지는 것처럼 쓰러졌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동북면은 두경승으로 인해 평정되었지만 서경에서 승리한 조위총의 부대가 개경으로 쳐들어오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후 이의방이 이끄는 고려 군대에 막힌 조위총이 퇴각을 하고 서경으로 다시 돌아가 기나긴 공성전을 펼치게 되고, 고려 왕실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원수,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임명하고 서경을 점령토록 한다. 이후 1년간의 공방전을 벌이며 두경승은  서경을 함락시키고 조위총을 참살하여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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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승과 이의민

3. 고려의 상장군이 된 두경승 - 이의민을 견제하다 

두 난을 극복하고 다른 무신들과는 달리 나라만을 생각하는 모습에 당시 힘없는 왕에 불과했던 명종은 기뻐하며 두경승을 상장군 자리에 올렸으며 더 나아가 삼한후벽상공신에 책봉하였다. 또한 지금의 국무총리격의 자리인 문하시중까지 이의민과 함께 승진시키니 그야말로 두경승은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두경승이 이렇게 빠르게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경승 자체의 성품과 능력도 있겠지만 명종이 두경승을 통해 사실 당시 조정을 어지럽히며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무신들, 그중에서도 이의민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명종이 이러한 전략은 나름 성공적이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이의민을 어느정도 견제하는데 성공했다. 실제 고려사에도 이의민과 두경승은 자주 충돌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의민이 두경승에게 욕석을 퍼부었지만 두경승이 웃으며 넘어간 부분이있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도 이의민이 두경승에게 불만을 품고 주먹으로 기둥을 쳤더니 지붕이 흔들렸다고 한다. 이에 두경승 역시 벽을 내려치니 그 벽이 뚫렸다고 전해진다.
 

4. 무신정권의 최종 빌런 최충헌의 등장 - 두경승의 최후

두경승과 이의민의 치열했던 견제는 뜻밖에 이의민이 암살을 당하면서 무너진다. 

1196년 최씨 무신시대를 열어제친 최충헌이 이의민을 암살한 것이다. 폭정을 일삼으려던 이의민이 죽은 것은 기쁜일이지만 최충헌의 야욕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두경승이었다. 이때 최충헌이 두경승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1196년 8월, 고려의 왕과 태자가 행차를 하다가 그 수레가 구경을 하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당황한 사람들이 왕이탄 가마에 문제가 있다고 외치자 수행하던 신하들이 모조리 도망갔다. 그러나 두경승만이 홀연히 왕과 태자를 지키고 서 있었다. 사실 이는 최충헌의 동생이었던 최충수가 꾸민 계략이었는데 두경승은 속지 않고 고려 왕실을 지킨 것이다. 

이를 본 최충헌은 앞날의 장애물이 될 두경승을 1197년 9월, 명종을 폐위시킴과 함께 두경승을 상의할 일이 있다며 불러 그대로 붙잡아 지금의 영종도(인천국제공항이 있는 곳)로 유배보내버린다. 두경승은 이후 2달 뒤, 유배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두경승이 울분으로 인해 죽었다는 설, 암살 당했다는 설, 독살 당했다는 설이 분분한데 그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인천국제공항과 신도시로 가득찬 영종도에는 지금도 두경승을 모시는 사당과 묘소가 있으며 만경 두씨의 중시조이다. 


두경승은 무신정변 이후 오직 권력만을 탐했던 무신들과는 달리 무신 본연의 자세로 최선을 다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그 무예와 장군으로서의 능력 역시 고려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대단했던 인물이다. 두경승의 고려 왕실을 향한 충절을 기억하며 고려 무신정권이 주는 교훈을 되새겨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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