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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정중부를 몰락시킨 청년무장 경대승, 그는 어떤 인물인가?

윤여시 2024. 5. 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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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정중부를 몰락시킨 청년무장 경대승, 그는 어떤 인물인가?

고려의 무신정권 시대는 그야말로 권력을 향한 탐욕의 시대였다. 무신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권력의 정점에 서려고 했고 고려 조정은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몇번이나 최고 권력자들이 바뀌는 상황에서 고려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고려의 무신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여기 무신정권 2대집권자인 정중부의 폭주를 막아세우고 다시 이전의 고려로 만들고자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경대승이다. 그는 누구일까? 

 

고려 경대승
드라마 무인시대에 등장한 경대승(박용우)

1. 경대승의 출생과 성장 일화 

 

경대승은 지금의 청주 사람으로 그 아버지 경진은 평장사(정 2품 관직)를 지낸 고위 관리였고 집안 역시 꽤 유명한 가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경대승은 어렸을 때부터 그 힘이 남달랐고 이미 큰 뜻을 품은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대승의 아버지 경진은 당시 모든 실권을 장악한 무신 정중부의 편에 서서 많은 부와 권력을 움켜쥔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었던 경대승 역시 불과 15살의 나이로 당시 음서제도를 통해 왕의 친위대였던 견룡군(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의 교위가 되었다. 

하지만 경대승은 어렸을 때부터 권력을 휘두르는 정중부와 그 옆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 경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더군다나 경진이 청주 일대의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데 급급했으므로 경대승은 아버지 경진이 죽은 뒤 모든 땅을 나라에 돌려줘 버릴 정도로 탐욕이 많은 무신들을 싫어했다. 더 놀라운건, 이때 빼앗은 땅 말고도 자신의 집안이 가지고 있는 땅까지 모두 돌려줘 버리는 바람에 자신과 그 가족은 생활고까지 겪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청렴했던 것이다.

 

여튼 경대승은 자신의 능력과 집안의 배경의 덕으로 인해 미친듯이 진급을 하고 자신의 나이 27살이 되던 해, 불과 10년만에 정 4품의 장군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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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대승 정중부를 척살하다 - 기해정변 

- 배경 (경대승의 분노)

당시 고려 조정은 그야말로 정중부와 그 아들 정균의 시대였다. 그들의 폭정과 고려 조정에 대한 무시와 폭거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경대승은 이러한 정중부 일당을 보고 항상 분노에 차있었고, 그 성정상 이미 정중부를 없애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정중부를 적대시한 일이 발생하는데 청주에서 한 사건 때문이었다. 청주에 계속 살던 사람들과 낙향한 사람들간의 싸움이 벌어졌고, 이 일로 사망자만 100명에 달했다. 경대승은 당시에 청주의 사심관이라는 직책으로 근무중이었는데, 이를 막지 못해 파면에 쳐해진 것이다. 이러한 일들로 경대승의 분노는 극에 달았다. 

또한 정중부이 아들 정균이 고려 왕실의 공주와 강제로 결혼하려 한 점,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이 고려 대신들을 시기하여 모함으로 좌천 시킨 점으로 인해 경대승은 정중부를 참살할 계획을 세운다. 

 

- 진행 (짧고 날카로운 정변)

1179년 9월, 경대승은 고작 30명의 결사대와 함께 거사를 단행한다. 그야말로 웃긴 일이었다. 보통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압도적으로 거사를 하는데, 이는 거사를 성공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경대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암살에 가까운 거사를 일으킨다. 

그는 자신이 아끼는 부하이자 당시 견룡군 교위에 불과했던 허승을 궁안에서 내응하게 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당시 장경회라는 행사를 지내고 호위를 서던 병사들이 잠에 취해 있었는데 허승이 먼저 궁에 들어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을 죽인다. 사실 허승은 정균이 아끼던 부하이기도 했는데, 허승은 경대승을 택한 것이다. 

허승의 거사 시작 신호와 함께 경대승과 그가 이끄는 30명의 결사대는 궁에 있는 정중부 세력을 무참히 척살하였으며, 경대승은 고려 명종을 찾아가 거사를 보고하고 궐 밖에 있는 정중부의 체포 승인 요청을 한다. 안그래도 시달리던 명종은 이를 승낙하고 결국 정중부를 체포하여 참형에 처한다. 2대 무신정권 집권자 정중부의 허무한 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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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 

거사에 성공하고 명종은 물론 문무백관이 정중부를 죽인 경대승에게 경축인사를 말했다. 그러나 경대승은 '왕을 시해한 자(이의민)가 아직 살아 있는데 어찌 축하인 사를 받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이는 무신정변 당시 왕이었던 의종을 암살한 이의민을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의종이 폐위되고 왕위에 오른 명종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경대승이 빠른 기습으로 정권을 잡긴 했지만 이전의 이의방이나 정중부처럼 세력을 공고히 하고 벌인 것이 아닌지라, 경대승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쿠데타에 두려움을 떨어야 했다. 경대승은 자신의 정변에 도움을 준 허승, 김광립 등이 무도한 모습을 보이자 바로 죽이기도 하였다. 이는 아무리 부하일지라도 거사의 명분을 더럽히거나 자신의 기반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에게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경대승은 궁궐에 나가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머물며 조정과는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정의 중대사가 있으면 꼭 찾아가 명종에게 건의를 했고 명종은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한 대세가 이러하니 많은 고려의 신하들이 경대승의 집으로 찾아가는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경대승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을 막기 위해 자신의 집에 '도방'이라는 호위 병력 집단을 만들었으며 이들은 하나 같이 출중한 무술 실력을 보유한 정예 병력으로 경대승의 모든 경로를 호위했다고 전해진다. 

3. 경대승의 집권기 

경대승은 무신이었지만 문관들을 중요시 했다. 특히 무신들이 조정에 들어가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무식하거나 용기가 있지 않은 무관들을 사람처럼 보지 않았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이 같은 경대승의 정책을 무신정권 이전의 시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경대승의 '복고주의' 라고 부른다. 이러한 경대승의 태도는 고려 입장에서는 좋을 수도 있지만 경대승에게는 무신들을 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때문에 경대승 입장에서는 자신의 호위 조직 도방을 강화한 것)

 

경대승은 특히나 집권기 내내 의종을 암살하고 무신정변을 일으킨 인물중 한명인 이의민을 집권 내내 죽이고자 했는데, 이를 알아챈 이의민은 경대승의 집권 이후 자신이 죽을까봐 납작 업드려 북쪽의 병마사로 나가 변방을 지키고 있는다.

 

어느 날 이의민이 북쪽 병마사에 있을 때, 경대승이 처형 당했다는 헛소문이 퍼진다. 이의민은 이 소식을 듣고는 '내가 경대승을 죽이려 했는데 누가 먼저 죽였구나 하면서' 크게 기뻐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의민의 이 같은 반응이 경대승에게 전해지게 되고 경대승은 더욱 분노하여 이의민을 죽이려 했다고 전한다. 이에 이의민은 더욱 납작 업드리고자 자신의 고향인 경주로 돌연 낙향하며 경대승이라는 소나기가 지나가길 바라며 숨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고려 경대승
경대승의 죽음

4. 경대승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다 

길 것 같았던 경대승의 집권은 허무하게 집권 4년이었던 1183년에 끝이난다. 바로 경대승이 30살의 나이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사실 경대승은 자신이 집권 했을 때부터 자신 역시 이의방이나 정중부처럼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고 성격이 예민해졌다고 전해졌으며, 이러한 상황은 경대승의 몸과 마음을 심약하게 만들었다. 

고려사에서는 자신이 죽인 정중부의 모습이 꿈에 나온후 경대승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고 전하는데, 이 역시 경대승의 당시 정신적 예민함과 두려움을 나타낸 사례라고 하겠다. 

 

경대승이 죽었을 때 고려사에서는 그의 상여를 보고 백성들의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는데, 기록을 봐서는 분명 다른 무신들과는 달리 경대승만큼은 백성에게 큰 인망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이 죽고 경대승의 도방은 당시 도방의 대장이었던 김자격이 갑자기 도방이 모반을 꾀한다고 밀고하면서 몰락해버린다. 경대승의 집권과 세력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경대승은 자신의 고향인 청주에 아버지와 함께 묻혀 있으며 그 묘는 지금의 청주 지북동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무신정권 중 유일하게 <반역열전> 명단에 경대승을 넣지 않았는데, 이는 다시 문신을 중히 여겼던 그의 정책이 어느정도 후하게 평가되어 있는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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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 명종, 이의민을 데려오다 

정중부에 이어 무신정권의 3대 집권자였던 경대승이 허무하게 죽자 고려 조정은 잠시나마 무신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다시말해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이때 당시 왕 명종이 올바른 생각을 가졌다면 충분히 고려 조정의 왕권을 강화했을 수도 있지만 뜬금 없이 경주로 피해있는 이의민을 불러 세운다. 

고려 명종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경대승이 무신정변 이전의 나라로 되돌려야 한다는 말을 공공히 하며 문신들에게 다시 권력을 쥐어주고 있는 터라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때문에 왕위에 오른 명종은 자신의 왕권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이의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경대승이 그토록 죽이려 했던 이의민이 다시 무신정권의 4대 집권자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의민의 행동은 그 어떤 무신정권보다도 잔혹했고 거만했다. 역사의 아이러니 인 것이다. 


자신이 무신이었지만 무신정변 이전의 모습으로 고려를 돌려놓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그리고 그의 기록 곳곳에서 백성을 생각했다는 행적을 찾을 수 있어서 그는 무신정권의 권력자들과는 차별점이 있었다. 물론 그를 온전히 의인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 무신정권에서 차별되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때문에 경대승이 만약 오래 집권했다면 어떤식으로 고려가 변했을지도 기대아닌 기대가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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