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정권을 열다! 무신의 난 정중부 그는 과연 누구인가?고려 무신정권을 열다! 무신의 난 정중부 그는 과연 누구인가?

Posted at 2022. 5. 28. 21:42 | Posted in 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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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의 난을 열다 정중부 그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 나라 역사상 무신이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잡았던 시기, 바로 고려 무신정권 시대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무신정권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정중부였다. 무신에 대한 부당함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으켰던 쿠데타, 하지만 그 역시 권력의 맛에 사로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정중부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출생부터 그의 최후까지 알아보자 

 

드라마 무인시대 중 정중부

|정중부의 출생과 군인이 되기까지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 1106년 태어났다. 그의 키는 7척 (약 1m 72cm, 당시에는 큰키를 자랑한다)을 자랑하는 거구였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얼굴은 당시 최고의 미남으로 용모가 뛰어나고 특히나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정중부가 청년이 되어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군적에 올라 개경으로 보내졌는데, 당시 재상이던 최홍재가 금위병을 뽑다가 정중부의 체격과 외모를 보고 궁궐 호위대인 공학금군에 편입시켰다. 이때부터 정중부는 본격적으로 무인의 삶을 보내게 된다. 외모 덕분에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로 들어가게 된것이다.

 

|정중부의 수염이 불태워지다 - 초급장교시절  

정중부는 인종(1122년 ~ 1146년)때 지금의 중위 정도 되는 직책인 견룡대정에 오른다. 견룡대정은 그가 처음 군인생활을 시작했던 공학금군과 같은 친위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때 정중부가 문신들에게 악감정을 갖는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섣달 그뭄이 되면 왕실의 역귀를 쫒는 의식을 했고 이때 신하들이 장기자랑을 벌이며 축제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해서 이때는 왕 곁을 지키는 내시, 다방, 견룡 등이 함께 춤을 추며 놀았는데, 이때 김부식의 아들이자 당시 과거에 급제하여 내시(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내시와는 다름)직을 제수 받은 김돈중이 정중부를 만만하게 보고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린다. 

그러자 화가난 정중부가 김돈중을 흠씬 두들겨 패는데, 이를 안 김부식이 분노하여 인종에게 정중부를 매질할 것을 간언한다. 인종은 당시 권세가였던 김부식의 청을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정중부에게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중부는 이때부터 문신 즉 김부식 부자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된다. 

인종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중부는 승진하여 장교 계급인 교위가 된다. 이때부터 정중부는 의종의 신임을 얻어 궁궐의 북문을 통해 왕궁을 제집 드나들듯 하였다. 이에 1147년 어사대에서는 정중부를 탄핵하여 처벌을 해야한다고 했으나 의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정중부 상장군이 되다 - 무인의 난 계기

의종의 신임을 얻고 승승장구하던 정중부는 1170년, 무신 중 최고의 관직인 상장군에 이르게 된다. 정중부는 이제 왕의 최측근을 보좌하는 경호실장이 된것이다. 그러나 이때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멸시는 최고조에 다다른다. 여기에 의종 역시 주색에 빠져 거의 매일을 임종식, 한뢰 등 문신과 향락에만 빠져 있었다. 

이와중에 의종은 호위병들을 대동하여 주색에 빠졌는데, 매일 쉬지도 못하고 연회에 이끌려 다니면서 호위만 해야하는 무신들의 불만은 가득차기 시작했다. 물론 문신들은 대놓고 무신들을 괄시하고 천대했던지라 그들이 힘든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에 무신들의 불만이 터져나왔고 정중부를 필두로 반란을 모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170년 8월 29일 무인들은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의종은 이날에도 어김 없이 연회를 베풀며 문신들과 놀기 바빴는데 호위군사들은 배고픔을 견뎌가며 불만이 가득찬 상황이었다. 이에 이의방과 이고 등 젊은 장수들은 정중부에게 거사를 도모하자고 하였다. 

정중부는 이에 거사할 마음을 굳히고 의종이 여기를 떠나 환궁하며 다음으로 거사를 미루고 보현원으로 옮기면 실행에 옮기자고한다. 그리고 의종은 역시나 더 놀기 위해 보현원으로 향한다. 

 

|정중부의 난 일어나다 - 이소응 수박희 사건

다음날 보현원으로 가기 위해 오문까지 왔을 때 왕은 문신들을 다시 불러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의종이 호위병들이 다 지쳐 보이고 힘이 없어 보였던지라 무관들을 위로하고자 수박희(대련)시합을 시킨다. 수박희가 시작되고 대장군 이소응과 젊은 장교가 시합을 벌였는데, 이소응이 나이가 있어 힘이 약한 탓에 수박희 도중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를 보고 있던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도망가는 이소응의 뺨을 쳤고 왕과 주변의 문신들은 손뼉을 치며 이소응을 비웃었다. 이에 정중부가 분노하여 한뢰를 꾸짖자, 의종이 정중부를 달래며 말린다. 이를 본 이고가 분노하여 칼을 뽑으려 했으나 정중부가 때가 아니라며 막았고, 의종의 행렬이 보현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무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부터 일방적인 무인들의 살육이 벌어진다. 

이고와 이의방은 임종식과 이복기를 칼로 쳐죽이고 한뢰는 겁을 내며 의종 앞으로 달려가 옷에 매달렸다. 그러자 이고가 칼을 뽑아 들고 한뢰를 위협했고 한뢰는 어쩔 수 없이 왕의 옷자락을 놓고 나오자마자 이고의 칼에 맞아 죽는다. 이 와중에 김돈중은 도망을 갔다가 시종의 밀고로 잡혀 죽고 만다. 이미 죽은 김부식 역시 부관참시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무신의 난, 보현원의 난, 정중부의 난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고려 100년의 무신정권이 시작되게 된다.

이때 정중부의 나이는 60대 중반이었다. 이 사건 이후 9월에 의종을 폐위하고 의종의 동생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바로 고려 제 19대왕 명종이다. 정중부는 명종을 왕위에 세우고 공신자격으로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 등 엄청난 지위를 얻게 된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

|정중부 최고 권력자가 되다

무신의 난때 무신들이 정중부를 찾아와 반란을 도모하자고 했으나 쿠데타에서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이의방과 이고였다. 특히 이의방은 무신정변 이후 이고를 제거하고 명실상부 자신이 일인자인냥 행세를 하고 다녔다. 

정중부는 이의방의 기세에 눌려, 이고의 죽음 이후 직위를 물러나겠다고 하는 한편 이의방의 권력 팽창을 보며 잠시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무신 정변 이후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어나고 이의방의 폭정이 계속되면서 이의방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서경유수 조위총의 반란에 이의방이 패퇴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의방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 기회를 포착한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1174년 12월 이의방을 암살하면서 모든 정권은 정중부와 정균에게 넘어오게 된다. 

 

무신의 난 이후 4년만이었다. 

 

|정중부의 최후 

정중부는 70세의 나이에 모든 권세를 다 갖게 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은퇴를 했으나 뒤에서 그의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을 받쳐주면 온갖 권력을 행사했다. 정중부 일파는 겉으로는 문신들을 다시 등용하는 등 화해의 제스쳐를 취했으나 아들 정균은 명종의 공주를 둘째 아내로 삼으려는 말도 안되는 행위를 하였고 그의 사위 송유인 역시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는 등 조정은 이들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 일어났고, 정중부는 어떻게든 민심을 돌리고자 노력하였으나 그가 권세를 잡은지 5년만인 1179년 26살 청년 장군 경대승이 정중부와 정균, 송유인을 암살하면서 그의 치세도 문을 닫게 된다. 


고려 무신정권의 막을 연 정중부, 그가 일으킨 무신의난은 처우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경향을 띤 쿠데타였던 부분이 강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정치적 개혁이라든가 비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민심을 얻는데 실패하는 원인이 된다. 

 

고려 100년의 무신정권을 열어 젖힌 정중부... 비록 부당하고 억울한 처우에 일으킨 쿠데타였지만 결국 민심 없는 권력은 금방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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