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의 부인, 혜종의 어머니 지혜로웠던 장화왕후 오씨! 그녀는 누구인가?
태조 왕건은 당시 후삼국을 통일하며 지방 호족들의 마음을 얻는 전략 중 하나로 혼인정책을 실시했고, 그결과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녀를 둔 대가족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왕건의 다음 보위는 둘째부인이었던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혜종이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나주를 본적으로 둔 씩씩한 여성이었던 장화왕후 오씨 실제 역사에서는 어땠을까?
1. 장화왕후 오씨의 출생과 왕건과의 만남
장화왕후 오씨는 지금의 나주와 목포 지역 사람으로 부친은 오다련군이다. <고려사>에서는 그녀를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라 기록하고 있지만 더 구체적인 집안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그 아비 이름 다련군은 왕건이 내린 이름으로 왕건의 장군시절부터 나주 공략에 도움을 주었고 왕위에 올라서도 모든 힘을 다해 지원했지만, 나주 공략을 시도한 견훤에 의해 그 세력들이 많이 약해졌고 이를 안타까워한 왕건이 많이 불쌍하다는 뜻의 다련군이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한편, 장화왕후의 가문이 있었던 당시 나주와 목포는 당나라와 왜국을 잇는 중요 거점항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해상왕 장보고를 비롯하여 여러 해상 세력들이 모여 있는 중요도시였다. 그 아버지 오다련 역시 목포와 나주에 상당한 지분이 있는자였으며, 때문에 당시 신라 6두품 귀족 중 하나였던 연위라는 인물의 사위가 되었고 장화왕후를 낳았다고 한다.
- 장화왕후와 태조 왕건의 만남
장화왕후가 처녀시절, 나주 포구의 한마리 용이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게되고 혼인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태몽과 같은 꿈을 꾼것이 이상해서 그 부모에게 말했더니 부모도 신기하게 여겼다.
그런데 얼마 후, 당시 태봉의 수군대장군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후백제의 뒷통수를 치는 나주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목포(현재 나주역 부근)에 상륙하게 된다. 그런데 왕건이 배를 정박하고 상륙하였더니 찬란한 오색구름이 서려있었고 왕건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말을 끌고 갔더니 한 샘가에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처녀가 바로 장화왕후였다.
왕건은 때마침 목이 말라 장화왕후에게 물 한바가지를 요청했는데 장화왕후는 쑥스러워하며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물을 주었다. 이에 왕건이 버드나무 잎을 띄운 이유를 물으니, 장화왕후는 아무리 물이라도 급히 마시면 체할까봐 천천히 물을 먹도록 배려한 것이라 말했다고 전한다.
- 장화왕후와 태조 왕건의 하룻밤
기록에 의하면 왕건과 장화왕후의 첫만남 이후 왕건은 장화왕후를 마음에 들어해 하룻밤을 동침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왕건이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이 미천하기 때문에 임신을 시키지 않으려고 왕건이 오씨를 피해 당시 누워 있던 돗자리에 사정을 하였는데, 장화왕후 오씨가 이를 흡수하여 임신하였고 후에 혜종이 되는 아들을 낳게 된다는 설화가 있다.
후일담이지만 그래서 혜종의 이마에는 돗자리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혜종의 왕권을 무시했던 그 동생 정종과 광종이 왕위를 잡으면서 생긴 근거 없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장화왕후가 왕건을 만난건 그녀의 나이 17살때였으며 대략 910년 전후 무렵으로 추측되는데 그 이유는 혜종이 912년 태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나이는 대략 893년 ~ 895년 정도가 될 수 있다.
또한 왕건과 장화왕후가 만난 지금의 나주 완사천은 마르지 않는 샘이 나오는 작은 옹달샘이었으나 지금은 나주역 인근의 주위 개발로 현재는 만남을 기리는 동상과 함께 그 모습만 남아 있다. 후에 혜종이 태어난 이 일대를 흥룡동이라고 했고 완사천 위에는 장화왕후 오씨를 기렸던 흥룡사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조선 세종때 문을 닫았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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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혜종을 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장화왕후가 나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장화왕후 오씨의 호족 세력이 강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장화왕후의 발목을 잡는다. 특히 그 바로 밑에 왕건의 셋째부인인 충주부인 유씨(후에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집안이 막강하였으므로, 장화왕후의 아들이 장자였음에도 왕위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된다.
왕건 역시나 장화왕후와의 아들 왕무가 7살이 될 무렵, 그 총명함을 인정하고 왕이 되어도 된다고 판단하여 세자 자리를 빨리 주려고 했으나 충주 유씨 세력의 반발이 걱정되고 조정의 분란이 걱정되었던 상황이었다.
해서 왕건은 마치 신하들의 뜻이 왕무를 세자 자리에 올려도 좋다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상자에 자황포(고려 초 왕이 입었던 적황색의 포)를 담아 장화왕후에게 준다. 장화왕후는 이를 받고 왕건의 뜻을 알아채고, 공신 박술희에게 전달하였고 박술희 역시 왕건의 뜻을 알고 신하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왕무를 세자 자리에 책봉 할 것을 주장한다.
이에 당연할 것만 같았던 세자 자리가 겨우 장화왕후의 아들 무에게 돌아가게 된다.
3. 장화왕후의 죽음과 안타까운 평가
장화왕후는 분명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음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 증거가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 그녀의 무덤이 어디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점과 왕건의 시호에 들어간 신(神)자도 받지 못하고 시호로 장화왕후만 받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려 2,3대왕인 정종과 광종을 낳은 신명순성왕후 유씨, 신정왕후 황보씨, 신성왕후 김씨 등 고려 초기 왕을 낳은 부인들은 모두 신씨를 넣었는데 유독 장화왕후만 이를 받지 못한 것이다.
한편 그녀의 죽음도 943년 왕건이 죽기 10년전인 934년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또 다른 기록에서는 혜종의 즉위까지 보았다는 기록도 있어 아쉬운 부분도 있다.
또한 혜종에 반기를 들었던 충주부인 유씨의 가문이 집권하면서 정종, 광종대에 혜종과 그 모친 장화왕후의 기록 역시 많이 폄하 된 부분이 있으며 앞서 말한 것처럼 이때에 왕건과 장화왕후의 하룻밤 이야기 역시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장화왕후 오씨, 왕건의 두번째 부인이지만 장자까지 낳으며 고려 초 왕건을 보필한 현명한 여성이었다. 물론 그 기록이 거의 전설처럼 설화로 남아있는 부분은 아쉽지만, 이 역시 분명 그녀의 역할이 역사속에서 어느정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고려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속 장화왕후의 모습을 보면 더욱 재미있게 역사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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