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후백제의 마지막 왕 신검, 그는 누구이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윤여시 2024. 7. 1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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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의 마지막 왕 신검, 그는 누구이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과거 우리 역사속 왕실에서 장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곧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으로 생각되었다. 때문에 장자가 아닌 다른 자녀가 왕위를 이어 받는 것은 엄청난 반발을 가져오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후백제 신검이었다. 자신이 장자였음에도 견훤의 사랑을 받지 못해 왕위를 빼았겼고, 결국 나라를 몰락으로 가져간 후백제 신검 그는 누구일까?

 

후백제 신검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신검역을 맡은 배우 이광

1. 신검의 출생과 성장 

신검은 885년 견훤과 첫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견훤의 나이는 18살로 당시로서도 꽤 빠르게 아들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때까지만해도 견훤은 신라의 장수로 신검이 7살무렵인 892년이 되어서야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견훤의 가계에 대한 기록은 물론 신검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 역시 혼잡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초창기 그가 어찌 태어났고 성장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견훤에게는 여러명의 부인에게서 얻은 10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었는데, 신검은 그 중에서 장자라는 점아다. 우리가 신검이라 부르는 것은 익숙하지만 당연히 견훤의 성을 이어 받았으므로 견신검이 그의 풀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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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검, 연전연패의 전투 기록과 아우 금강

신검의 전투 기록은 여럿이 있다. 후백제의 왕위를 이을 명분을 가진 왕자라 그런지, 당시 후삼국을 가른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흔적이 있다. 견훤의 나름의 자식 교육이었던 셈인데, 물론 고려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이므로 신검의 승리 부분이 일정 부분 없을지라도 전투에서 크게 활약은 하지 못한 것 같다. 

924년, 아우 양검과 함께 조물성 전투에 참여했으나 별 이득이 없었다. 
933년, 서라벌을 공격하려 했으나 유금필에게 패하여 돌아갔다. 

등등의 기록을 봤을 때, 분명 신라의 장수에서 한 나라의 왕이 된 견훤의 마음에는 그리 크게 들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여기에 927년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하며 기세 등등했던 후백제가 이후 930년 고창전투에서 박살이나고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면서 성격 급한 견훤은 더욱더 못난 신검이 마음에 안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당시 신검, 양검, 용검과는 다른 부인의 소생인 넷째아들 금강이라는 존재였다. 금강은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여 견훤이 유독 아끼는 아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신검의 무능, 후백제의 내리막, 견훤의 금강 사랑이 맞물리면서 신검은 장자임에도 점차 왕위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3. 신검, 아버지 견훤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다 

견훤은 앞서 말한 이유들을 통해 자신의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며 이를 공공연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검은 견훤이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존재했던 아들로 그의 세력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견훤의 판단을 이미 알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왕위를 빼앗기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절박함에 맞닿뜨리게 된다. 더군다나 이찬 능환, 파진찬 신덕을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이 장자였던 신검을 지지하고 있던지라 신검에게는 견훤이 알아채지 못한 힘과 명분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 신검은 왕위를 찬탈하고자 칼을 뽑았다. 당시 신검의 동생 양검, 용검은 각각 강주와 무주 지역의 군대를 갖고 있었는데, 신검과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은 제대로 성공하여 아우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폐위한뒤 지금의 김제에 위치한 금산사에 가둬버리고 장수 파달을 통해 지키도록 한다. 

반란이 일어날 당시, 견훤이 군사가 움직이는 소리에 깨서 무슨일이냐고 묻자 갑자기 신검이 들어오더니 아버지께서 늙으시어 판단이 부족하므로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권력 앞에서는 부모 자식 관계도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울부짖는 신검
울부짖는 신검

4. 신검의 짧은 재위기간과 일리천 전투

민심을 잃은 왕은 오래갈 수 없듯이 신검이 아무리 자신만의 명분을 무장했다 하더라도 당시 아버지를 내쫒고 그 아들을 죽인 행동은 백성들이나 당시 호족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여기에 935년 6월 금산사에 갇혔던 견훤이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해버리면서 후백제의 민심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몰락속에 신검은 어떻게든 민심을 돌리려고 전국의 사형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해주고 왕위에 올라버린다. 이때가 935년 10월의 일이었으니 견훤을 내쫓은지 반년이 더 지나서 겨우 왕 자리에 오른 것이다. 

신검은 왕위에 오른 후 후당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등 외교에 힘써보려 하는 등 어떻게든 등돌린 민심을 잡기 위해 노력해본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후백제의 마지막을 알리는 최후의 전투 '일리천 전투'가 다가온다. 

- 일리천 전투 

936년 10월 지금의 구미 지역에서 벌어진 후삼국 최후의 전투이다. 당시 망명해온 견훤과 이를 보고 역시 항복을 선언한 신라 경순왕이 있는 고려가 이제 마지막으로 후백제를 멸망시키러 온 전투로 고려는 무려 8만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로 밀려들어온다.

고려의 군대도 군대지만 이미 신검은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도 처참했다. 이에 일리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애술 장군 등이 투항하여 오히려 후백제의 신검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등 역할을 하며 후백제는 완전하게 무너진다. 일리천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무너진 후백제군은 논산 지역 당시 황산벌로 가 전투를 하고자 했으나 이 역시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신검이 자신들의 신하들과 아우를 데리고 고려에 항복을 한다. 후백제의 멸망이었던 것이다. 

5. 신검의 최후 

일리천전투의 패배이 후 그자리에서 왕건은 역적 능환을 죽이면서 반역자의 최후를 보여주었지만 신검과 용검, 양검은 당시 후백제의 민심을 고려하여 살려두고 각각 유배를 보내버린다. 이때 양검, 용검은 진주로 유배를 떠났고 얼마 후 이곳에서 반역의 죄를 물어 처형하지만 신검의 경우 벼슬을 주었다는 이야기만 있을뿐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는 역사에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이후 신검이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그 두 아우가 죽었다는 점 등을 들어 신검 역시 소리소문 없이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는 설이 정설이긴 하다. 이는 신라를 바치고 고려에서 중심 호족이 된 경순왕과는 전혀 다른 결말인데, 아무래도 천년 제국 신라라는 명분과 함께 어찌됐든 신검은 전투에서 패배해 항복했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를 몰아내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 등이 신검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여튼 이러한 신검의 죽음은 그가 언제 죽었는지 또 어디서 죽었고 어디에 묻혔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그의 흔적은 이제 역사속의 문장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후백제 신검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절에 가둔 것에서 권력의 무서움을 보았고, 또 민심을 잃을 때 한 나라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도 볼 수 있었다. 역사속에서 영원한 기록으로 남아 평가 받을 그의 인생을 통해 지금의 위정자들이 많은 교훈을 깨닫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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