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와 해몽으로 삼국통일에 기여한 고려 최지몽, 그는 누구인가?
500년 고려 역사의 태동기를 주제로한 <태조왕건>, <제국의아침>, <천추태후> 드라마를 보면 여러 내노라 하는 조정신하 중에 유독 꿈과 천문에 밝은 인물로 나오는 인물이 있다. 바로 최지몽이다. 옛 시대는 꿈의 해몽과 별자리에 대한 운세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만큼 고려의 초창기 공신으로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최지몽 그는 누구인가?
1. 최지몽의 출생과 왕건과의 만남
최지몽은 907년 지금의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사실 이 당시 아무리 공신이라해도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최지몽은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의 통일은 물론 이후 고려의 6왕을 섬기면서 63년간, 활약을 했기에 그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편인 것 같다.
어려서부터 이미 총명하고 학문의 깊이가 깊었던 최지몽은 점괘와 천문에 밝은이로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여기에 그의 아버지 최흔은 이미 고려를 대표하는 영암의 해상 토착 세력으로 왕건이 후백제의 뒷통수를 가격한 나주침공 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나주와 영암은 가까운 거리다) 어느 정도 고려 조정에 연과 지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같은 영향을 받아 왕건은 18살의 나이인 최지몽을 궁으로 부른다.
그리고 최지몽이 입궐하자마자 왕건은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최지몽에게 물어보는데, 최지몽이 꿈 이야기를 듣더니 이는 왕건이 삼한을 통일할 길몽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왕건은 기뻐하며 그 이름을 '꿈을 아는자'라는 뜻을 담아 지몽이라 이름 붙여줬다고 한다. 참고로 최지몽의 본명은 본래 최총진이었는데 이때부터 최지몽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이때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지 7년 되는 924년의 일이었다.
이후로 왕건은 최지몽의 꿈 보는 재주와 천문 보는 재주를 귀히 여겨 관직을 주고 곁에 두었다고 전한다. 그러고보면 역시 꿈해석은 맞든 틀리 물어본 사람의 의중을 헤아려 말해주는 것이 최고인 듯 싶다.
여튼 최지몽의 신묘한 재주가 있었던지, 왕건은 국가의 대소사를 알고 싶거나, 후백제와의 전쟁이 있으면 최지몽을 꼭 옆에 두고 함께 했으며 그 조언을 들었다. 왕건에게 있어서 최지몽은 징크스이자 나름의 참모였던 것이다.
2. 고려 왕실과 함께하다 - 혜종 시기
이미 태조 왕건 때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른 최지몽은 왕건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나이가 37살 밖에 되지 않았으며, 최지몽은 이후에도 고려 왕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왕건이 죽고, 2대 왕 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최지몽은 고려 왕실을 위해 많은 일을 도맡아 한다.
혜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건의 혼인정책을 통한 중앙집권으로 인해 왕자들이 스무명이 넘었고 혜종의 나주 가문은 그 힘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또한 혜종 역시 역사에 따르면 병약하여 (후삼국 전쟁 때 항상 앞서 나가던 혜종이 갑자기 왜 병약해졌는지는 의문, 고려 광종때 쓰인 역사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심이 필요함) 왕권이 제대로 서질 않았다.
이에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자신의 손자를 세우기 위하여 왕건의 세번째 부인인이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호족세력이었던 청주가문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왕실은 사실상 혼란에 빠진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규가 청주가문의 왕자를 없애려는 뜻을 혜종이 받아주질 않자 모반을 일으키려 했는데, 최지몽이 이를 점괘로 알아채고 혜종에게 알려 위협을 벗어났다고 전해진다. 또한 최지몽은 당시 천문의 관찰과 예측을 하는 사천공봉이라는 직위에 있으면서 왕규가 청주 유씨의 왕자들을 모함할 때, '유성이 국왕의 별인 자미성을 침범하였다'라고 하며 왕규의 야심을 비난 했다고 전해지기도한다. (다만, 청주 유씨의 왕자들 그러니까 후에 제 3대 정종, 제 4대 광종은 노골적으로 왕권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세력으로서 당시 유일한 혜종의 세력이었던 왕규를 죽인 인물들이기에 역사가 승자의관점이라 볼 때 왕규에 대한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3. 광종 시기
혜종이 승하한 뒤, 그 뒤에 왕위오른 정종 그리고 광종대에 최지몽은 왕규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는데 도움을 준 공로를 인정 받아 승승장구 하였다. 그러나 광종이 왕권 강화를 목표로 태조의 공신세력과 호족 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최지몽 역시 그 탄압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어느날, 귀법사에 행차한 광종과의 술자리에서 최지몽이 취해 예의를 지키지 않는 행동을 하며 무려 11년 동안을 외걸현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떠난다. 이때가 970년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평생을 고려 조정을 위하여 노력한 그의 점괘로도 알지 못한 뜻밖의 시련이었던 것이다.
4. 최지몽의 말년
그가 유배를 떠난지 11년 후 광종의 뒤를 이어 고려 5대왕 경종이 즉위하자 경종은 다시 최지몽을 불러들여 내의령 자리를 주었다. 이때 최지몽의 나이는 70세가 넘었지만 그는 다시 고려의 왕실을 위해 신묘한 점괘를 부린다. 특히 경종시대에 역모를 적발해 그의 신망이 고려 왕실에 널리 처졌다고 한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승하하면서 고려 6대왕 성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성종은 최지몽에게 최고 관직인 수내사령에 임하고 공신첩을 다시 준다. 이때 최지몽의 나이가 거의 80인지라, 조정에 나아갈 힘이 부족하여 사직을 요청했지만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몸이 힘드니 아침 회의 참석 등을 사면 해주는 파격적인 배려까지 해준다.
그리고 성종 6년인 987년 최지몽은 결국 병으로 몸져 누웠는데, 성종은 몸소 병문안을 오고 승려를 3천명이나 불러 쾌유 기도를 올리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그야말로 고려 왕실이 얼마나 최지몽을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최지몽은 그해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81세였다. 고려 왕을 6명이나 모신 공신의 영예로운 죽음이었다.
성종은 최지몽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태자태사에 추증하고 민휴라는 시호를 내리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한편 최지몽의 아버지 최흔은 지금의 영암을 뜻하는 낭주를 본관으로하는 낭주최씨의 시조였는데, 최지몽 역시 낭주최씨의 큰 조상으로 지금까 기억되고 있다.
지금까지 고려 초기와 함께한 인물 최지몽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당시 나이로 장수를 하며 6명의 왕을 섬기고 고려 왕실을 위해 노력했던 최지몽.. 그의 충성심과 능력을 기억하며 앞으로 고려초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제작된다면 그의 캐릭터를 꼭 봤으면 좋겠다.
'국사 > 고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백제의 마지막 왕 신검, 그는 누구이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0) | 2024.07.17 |
---|---|
태조 왕건의 부인, 혜종의 어머니 지혜로웠던 장화왕후 오씨! 그녀는 누구인가? (0) | 2024.05.25 |
무신정권 정중부를 몰락시킨 청년무장 경대승, 그는 어떤 인물인가? (0) | 2024.05.04 |
두경승 장군! 고려 무신정권, 진정한 무인으로 그가 추앙 받는 이유는? (2) | 2024.04.17 |
견훤 사위에서 고려의 장인으로 순천 박씨 시조 후백제 박영규 그는 누구인가? (1) | 2024.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