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깡패 연예계의 황제 야인시대 임화수 그는 누구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수많은 암흑기를 거쳤다. 그 중 가장 큰 암흑기와 비상식적인 순간을 뽑으라면 단연 이승만 정권의 독재체제를 완성시킨 자유당 독재를 뽑을 수 있다. 각종 부정부패는 물론 부정선거, 그리고 정치에 깡패가 개입해서 국정을 농단하던 시절.. 그리고 이 어두운 시절에 깡패이자 연예계의 황제라 불렸던 인물 임화수가 있었다. 그는 누구일까?
|임화수의 출생과 성장 - 영화를 알게 되다
임화수는 1921년생으로 지금의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권중각이었는데, 그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죽으면서 어머니가 재혼을 하였고 이때, 새아버지가 임씨여서 성을 바꾸며 개명하여 임화수로 불렸다.
그의 어렸을 적은 딱히 이야기는 없다. 다만 그는 스무살이던 1941년 절도를 하다 붙잡혀 형무소에서 2년을 살았고 이후 1944년에는 장물아비로 돈을 벌다가 붙잡혀 또 2년을 살다가 1년 후 광복에 맞춰 감옥에서 풀려났다. 즉 건달 중에 상건달이었던 것이다.
- 임화수 영화에 관심을 갖다
이처럼 딱히 영특함도 없었고 할 줄 아는 것은 범법이었던 것뿐인 그도 유독 좋아하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영화였다. 그는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해서 극장에서 일을 했는데, 일본인이 경영했던 평화극장 (지금의 종로 5가 국민은행자리)이 적국의 재산 자본으로 풀리면서 임화수가 운이 좋게 이를 인수하게 된다.
이로 인해 별볼일 없던 임화수가 극장주인으로 변하게 되고 이를 통해 영화사까지 차리게 된다. 즉 영화 제작부터 배급 그리고 극장까지 나름 지금의 CGV처럼 영화 산업을 시도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의 선두주자이자 영화에 출연하는 연예계까지도 영향을 끼치며 빠르게 성장해나간다.
- 임화수 이정재의 동대문연합의 2인자가 되다
임화수의 고향인 여주는 향후 정치깡패의 독보적 존재가 되는 이정재의 고향인 이천과는 바로 옆 동네이다. 때문에 임화수는 이정재와 일찍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정재와 조직폭력배 단체를 구성하는 초기 작업을 함께 하였다. 이른바 동대문 사단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 임화수는 조직에서 단숨에 2인자 역할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더해 이정재의 동네 후배이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책임을 맡으며 문고리 역할을 하던 곽영주와도 인연이 닿으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1955년 당시 찾아보기 힘든 한국연예라는 지금의 기획사를 세우고 내노라 하는 당대 배우들과 전속계약을 체결한 후 영화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합작 영화로 당시 홍콩과 합작한 영화부터 당시에는 보기 힘든 기술이었던 컬러영화까지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임화수의 악행
그가 먹고살기도 바빴던 그 시절 나름 우리나라 영화산업에 있어 역할한 부분도 있지만 그의 악행은 이러한 부분을 덮기에 충분하다.
- 관제 영화 제작
먼저 그는 당시 이승만 정권을 찬양하는 형태의 정부의 목적이 강력하게 주입된 영화들을 만들어 냈다. 특히 자유당으로부터 직접 거액을 지원받으며 이승만 찬양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가 뭐 얼마나 이승만을 존경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곽영주의 소개로 이승만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임화수가 갑자기 큰절을 올리며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라고 한 것과 이에 이승만이 기뻐하며 임화수를 아들로 생각하겠다고 한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이다.
- 불법 배우 동원 폭력 행위
뿐만 아니라 그는 연예계 황제라 불리는 자신의 권력을 그대로 이용하여 여성 배우들을 고위 권력자들에게 성상납 시키는데 일조했으며, 남자 배우들에게는 깡패 아니랄까봐 폭력을 저질렀는데, 특히 자신이 기획한 반공예술인단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당대 가장 유명한 희극인이었던 합죽이 김희갑을 구타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다.
이때 김희갑은 늑골이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으며, 이말고도 임화수는 남자 배우들을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지배했다고 전해진다.
- 불법적인 선거 개입
자유당의 폭주가 멈추지 않고 영원한 집권을 향해 욕망을 드러내며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임화수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돕고자 앞서 말한 것처럼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하여 자유당 선거 운동에 투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화수는 동대문사단의 우두머리였던 이정재가 자유당 이기붕과 선거를 앞두고 갈등을 빚으면서 동대문 사단은 물론 자유당과 모든 인연을 끊고 집에서 나오질 않았는데, 2인자였던 임화수가 비어있는 이정재 대신 동대문 사단의 우두머리로 올라서며 본격적으로 선거에 개입한다. 이때 자유당에 반대하는 야권 정치인들을 테러하고 유세를 방해하는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을 벌이게 된다.
|임화수의 몰락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독재가 이제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일어난 3.15부정선거로 인해 국민들은 그야말로 들불처럼 독재타도를 외치며 일어난다. 이때 서울에서도 대학생들이 수없이 학교에서 거리로 독재를 규탄하고 부정선거에 대항하기 위해 나왔고, 고려대의 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오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때 임화수의 지시를 받은 동대문사단의 주축이었던 화랑동지회라는 단체가 이를 습격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정당한 학생들의 시위가 정치깡패들의 집단 테러에 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당시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하며 다루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무너진다. 이후 정치 테러를 자행한 혐의로 이정재와 함께 체포된 임화수는 초반에는 6개월 정도의 형을 선고 받고 풀려나지만 곧이어, 박정희의 5.16군사정변 이후 다시 체포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에 회부된다.
|임화수의 최후
다시 군법에 회부된 임화수는 이때부터 부정선거개입 및 그동안 행해왔던 수많은 정치테러, 고대생습격사건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한 일은 하나 없다고 주장한다. 이때 자신이 말한 동대문사단의 실체와 화랑동지회 등은 자신은 물론 이정재의 사형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여튼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처럼 임화수는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고 이정재를 따랐을뿐이라며 발언을 하기 시작했고, 이를 듣던 유지광이 참지못하고 포승줄에 묶인채로 임화수에게 달려든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임화수의 발버둥에도 그는 결국 1961년 12월 21일 사형 집행을 받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임화수는 이때 사형장에 들어와서 불교 경전을 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임화수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우리나라 영화산업에 어느정도 기여한 바는 인정된다. 그러나 그가 했던 각종 관제 영화를 비롯하여 영화를 정치를 하는데 이용했다는 점, 그리고 각종 배우 폭행 등으로 인해 공보다 과가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암울했던 우리 정치의 흑역사 시절 임화수라는 인물이 과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없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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