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사태 1공수여단장 도희철 그의 실제 모델 박희도는 누구인가?
1212사태. 우리나라의 헌법을 무시하고 무력에 의한 군사정권이 도래했던 그 순간, 역사의 해석을 떠나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를 떠나서 절대 바뀌지 않는 팩트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훼손되기 직전의 절대절명의 순간 전두환과 그가 속한 하나회가 주축이 된 쿠데타를 분명 막을 수 있는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1공수여단장으로 쿠데타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희도이다.
1. 박희도의 임관 그리고 1공수특전여단장이 되다
1934년 생인 박희도는 경남 창녕 출생이다. 그가 졸업한 곳은 경북고등학교로 이곳은 하나회 인맥들이 유독 많이 졸업한 곳이다. 대표적으로 노태우가 있다. 다시 말해 노태우랑 우리나라 사회에서 그렇게 무섭다는 지연, 학연으로 엮인 몸인 것이다.
그는 육사 12기로 1956년 소위로 임관한다. 박희도는 육사에 다닐때 자신의 육사 한 기수 위였던 전두환을 만나게 되고 당시 생도의 신분부터 친분 관계를 유지한다. 다시 말해 1212사태의 주인공이자 두 대통령과 인연이 이미 닿아 있었던 몸으로 그는 운명적으로 군생활이 잘 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76년, 박희도가 대령에서 원스타인 준장을 달 때 당시 1공수특전여단장이었던 전두환이 당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령이나자 자신의 후임으로 박희도를 올려 박희도를 준장으로 진급시키려 했다. 이때 그는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에게 간절하게 부탁하여 진급 심사를 맡았던 정병주는 박희도를 준장으로 올린다. (1212쿠데타 때 자신을 진급시켜준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배신하고 서울로 진격한 박희도는 참으로 배은망덕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2. 박희도 군생활이 꼬일뻔 하다
이처럼 박희도는 가만히만 있어도 탄탄대로인 군생활에서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인한 두 가지 사건으로 군생활이 꼬일뻔한다.
첫 번째 사건은, 1976년 박희도가 1공수특전여단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다.
그해 8월 바로 북한군이 판문점 미루나무를 베던 미군을 도끼로 찍어 살해하는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분노하였고 이를 보복하고자 노재현(1212사태 국방부장관 당시는 합동참모의장)에게 말하여 당시 제1공수특전여단인 박희도를 통해 북한군을 보복하게끔 한다. 목표는 판문점에 위치한 북한의 불법 초소 4개를 박살내라고 한 것이다.
박희도는 곧바로 1공수특전여단 중 정예 64명을 뽑아 몰래 개인소총을 무장시켜 판문점으로 출동시킨다. 이후 북한의 불법초소 4개를 미군의 허락 없이 부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몰래 개인소총을 무장시킨 것을 확인한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자 미국 육군대장이 몰래 명령을 내린 박희도를 보직해임하고 문책하도록 강하게 항의한다. 그런데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시킨 것이기도 했고, 보복에 대한 성공도 나름 했으니 미국에게 잘 말해서 겨우겨우 무마시킨다.
두 번째 사건은, 1978년 충남 서산 앞바다는 당시 1공수여단의 작전위수지역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하여 군사 기밀을 캐고 그 지역의 정찰에 성공하였으며,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임진강을 건너 북한으로 돌아간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다시 말해, 작전에 완벽하게 실패한 것이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세호가 욕설을 퍼부으며 경계에 실패한 장군 박희도의 보직해임을 검토한다.
그런데 이때 특전사령관 정병주가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애걸한 끝에 겨우겨우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때도 결국 정병주로 인해 박희도가 살아남은 것이다.
3. 1212사태 그리고 박희도
1980년 1212 반란이 일어나자 1공수특전여단장 신분임에도 자신이 따라야 할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두환의 명령에 따른다. 그를 두 번이나 살려준 은인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쿠데타의 선봉장을 자처하며 전두환과 쿠데타 세력의 장성들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에 들어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의 체포 영장에 허락을 해달라는 반협박을 하기는가 하면 끝내 최규하 대통령이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재가부터 받아야 한다고 거절하자 자신의 1공수특전여단을 끌고 서울에 입성하여 국방부, 육군본부를 장악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박희도의 1공수특전여단이 서울 입성을 준비하는 사이 이를 막아야한 군 지휘부는 부평에 주둔하고 있는 제9공수특전여단을 서울에 먼저 입성시켜 이를 막고자 하나 전두환의 위장평화협정이라는 계략에 속아 9공수를 회군시키고 이를 틈타 박희도의 1공수특전여단이 서울을 장악하면서 국방부 지하에 숨어 있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연행하게 되고 마침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의 재가를 받으며 1212사태는 전두환 쿠데타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4. 박희도의 그 후 인생
말할 것도 없이 1212사태의 성공에 가담한 박희도는 막을자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육군 소장 진급과 26사단 사단장 그리고 특전사령관을 역임한 후 마침내 1985년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전군에 대통령선거에 나온 노태우를 찍으라는 기가막힌 명령을 내리는데, 얼마나 성공 앞에서 군의 위신이나 불법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고 벌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때 자연스럽게 예편되어 사회인이 되어야 했으나 전두환이 자신의 영향력을 노태우 정권에까지 미치고자 하는 이유로 연임을 하게 된다. 물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경질 시키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군에서 나온 이후에도 국회의원이 되고자 총선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두 번 모두 좌절된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1212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징역을 살다가 나와서 여러 단체에 소속되어 반공 극우 운동을 펼치며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는 지금도 1212사태의 타당성과 그들이 일으킨 5.18에 대한 사죄없이 당위성만을 말하고 있으며 태극기 부대와 함께 극우 행사가 있을 때 가끔 등장해서 망언을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서울의봄 도희철... 아니 실제 박희도의 인생만 놓고 보면 항상 모든 선택에 있어 인생에 있어서는 성공을 거둔 케이스이다. 작전에 두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그의 선택에 있어서 옳은 길은 없었다. 모두 헌법을 무시하며 공익을 무시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달려온 선택들뿐이다. 박희도는 아직도 1212사태나 5.18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부디 무엇이 옳은길이었는지 자신의 인생의 발자취와 선택들을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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