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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염석진 실존 인물? 백의사 염동진은 과연 밀정인가?

윤여시 2024. 3. 16.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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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염석진 실존 인물? 백의사 염동진은 과연 밀정인가?

천만 영화 <암살>의 빌런으로 배우 이정재가 역할을 맡은 염석진.. 그는 우리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우익으로 활동하며 김두환과 함께 공산당에 맞서 싸우는 인물로 묘사된 염동진에서 따온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염동진이 암살에서 등장하듯 나라를 배신한 밀정이라고 평가를 받는데 과연 사실일까? 염동진은 누구일까? 
 

염화 암살 염석진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 역을 맡은 배우 이정재

 

1. 염동진의 출생과 독립운동

- 출생과 성장

염동진의 일생을 알기 위해서는 그 출생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고 어떻게 독립운동으로 투신하게 되었는지 등을 살펴 보는 것이 좋다. 
 
염동진은 1909년 2월 지금의 황해북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어렸을적 본명은 염응택이며, 고향에서 보통학교와 상업학교를 다녔다. 이후 파주에 잠시 내려와 있다가 1934년 그의 나이 25살에 친척이었던 염온동이라는 인물의 추천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당시 독립운동의 감시가 삼엄하던 조선을 벗어나 중국으로 망명한 후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년의 교육을 끝으로 졸업한다. 참고로 낙양군관학교는 한국독립군총사령 지청천 장군이 장교들을 육성할 책임자로 있던 곳이었다. 

- 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공산계열의 독립 세력으로 분류되는 민족혁명당에 가입 후 활동하였으며 당시 중국 장제스의 준군사조직이었던 남의사에서도 활동한다.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남의사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 소속되어 있기도 했다.

사실 이후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1936년 일본 헌병대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해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때 그는 관동군에 협력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난 2021년 염동진이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로부터 특무비를 수령한 증거가 있으며 당시 일제에 대항하는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정찰은 물론 교통 연락망 등을 넘겼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참고로 이 기록은 1969년에 일제, 만주국 자료와 중국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 헌병대에서 일한 인물들을 정리한 자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염동진이 아직도 밀정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자료 하나만으로 그를 밀정으로 몰기엔 부족한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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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염동진은 이후 1940년에 이르러 다시 한 번 평양의 독립단체였던 대동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염동진은 1937년부터 40년까지 3년간의 기록이 없고 이때 밀정활동을 했다는 것이 된다. 여기에 그가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눈까지 멀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같은 부정확한 증거들로 인해 염동진은 밀정이었는지 여부는 충분히 논란이 될만하다.  

야인시대 백의사
야인시대 백의사 단체의 수장으로 등장하는 염동진

2. 염동진 해방 이후 우익활동 

- 중국 공산당에 의해 눈이 멀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염동진은 일본 헌병대의 고문으로 인해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와는 달리 중국 공산당에 의해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염동진 밀정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해방 이후 중국 공산당에게 붙잡혀 눈이 멀었다는 염동진의 주장은 그동안 해왔던 친일 밀정 행위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역시 증거가 있다고 한다. 
 
염동진은 해방 3개월 후인 1945년 11월 서울에서 낙양군관학교 출신 김혁(김승은)을 살해했는데, 당시 이를 조사한 특무대장 나병덕의 증언에 의하면 김혁을 죽인 것은 낙양군관학교 동지인 염동진이었으며 이는  밀정으로 활동한 자신의 행적을 감추기 위해 죽인 것이라는 증언이 남아있다.
 
여튼 일본에 의해서든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든 염동진이 해방 이후 한창 우익활동을 할 때만 해도 그의 눈은 멀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염동진의 우익활동 

염동진은 이북에서 소련군이 진주하자 조선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인 현준혁을 죽이고 남한으로 내려온다. 그는 이곳 지금의 낙원동에 아지트를 만들고 백의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당시 반공의 선봉장 역할을 하며 암살 시도는 물론 반공운동에 나선다. 

1946년 2월 김두한을 비롯한 백의사 단원을 투입하여 당시 남한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박헌영을 납치하려다 실패하였고 1947년 여운형 암살에 동원된 권총을 제공하기도 한다. 당시 남한에 주둔해있던 미군 방첩대와도 협조를 통해 공산세력의 남하를 막고자 하였다. 여기에 김일성 테러까지 독자적으로 감행했다 실패하는 대담함도 보인다.

다만 그의 암살 방법과 공산당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로 인해 미군에서조차도 악질적인 인물이라 묘사하면서 컨트롤 되지 않는 염동진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염동진 실제모습
염동진의 실제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 (낙양군관학교때 모습)

 

3. 김구의 암살을 백의사가? 염동진의 죽음

- 김구 암살에 개입?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염동진이 이끄는 백의사 세력은 그 힘을 잃어간다. 일각에서는 당시 완전한 통일을 주장하던 김구 선생을 안두희를 보내 암살하도록 한 것이 백의사라고 전해지는데 이 역시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당시 염동진은 중국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쪽보다는 김구쪽을 더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염동진은 해방이후 자신이 행해왔던 수많은 테러와 암살 등에서도 그 성격을 알 수 있듯이 강력한 군사를 바탕으로 한 정부를 꿈꿨는데 이같은 꿈을 이루어줄 지도자로서 이승만보다는 김구일 때 가능하다고 봤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김구의 암살설에 염동진이 개입했다는건 억측에 가깝다. 

- 염동진의 죽음

염동진은 6.25전쟁이 터지자 지인들이 피난을 가자는 권유도 거절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잡혀 그 이후에는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일각에서는 평양으로 가 처형 당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편 염동진이 이끄는 백의사 본진은 궁정동에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가 잘알고 있는 궁정동 안가로, 세월이 흘러 박정희 대통령이 죽는 10.26사건이 발생하는 곳이 된다.


결론적으로, 염동진의 일생에 대해서 다시 살펴 보자면 영화 <암살>에서 표현된 것처럼 염동진이 조국을 배신한 밀정이라는 설과 증거들이 있긴 하지만 정확하지 않으며 많은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염석진이 완벽하게 염동진을 모티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논란이 있는 행적들을 차용하였다는 것을 꼭 알고 영화를 시청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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