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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공수로 끝까지 전두환을 막으려했던 비운의 특전사령관 안타까운 죽음 정병주

윤여시 2023. 11. 1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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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공수로 끝까지 전두환을 막으려했던 비운의 특전사령관 안타까운 죽음 정병주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1212 당시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역시 9공수여단이었다. 만약 부평과 부천에 주둔하고 있던 9공수 여단이 서울로 들어오면 전두환과 하나회의 쿠데타는 자칫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보다 특전사령관인 정병주를 체포해야만 했다. 정병주 그는 과연 누구인가?

 

1. 정병주 사령관의  출생과 군생활

서울의봄에서 정병주 사령관 역을 맡은 배우 정만식

 

정병주는 1926년 지금의 경북 영주 용상리 배해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9년 육사 9기로 입교하여 바로 터진 6.25전쟁의 1연대 소대장으로 참전한다.

 

1967년 제1공수특전단장에 처음 오른 후 차지철과 친해졌으며 이후 1968년 준장 진급, 1971~74년 제5보병사단장을 지내다가 차지철이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권력을 가지게 된 후 1974년 차지철이 정병주를 경호차장으로 선택했고 대통령 경호실에 들어갔다가 육군특수전사령관으로 임명, 이후 계속 특전사령관을 맡는다. 그야말로 정병주는 특전사쪽에서는 대단한 관록을 가진 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1212사태와 정병주 

             

1212사태가 일어나기 일주일전 전두환은 당시 하나회 소속도 아니고 자신들의 쿠데타에 걸림돌이 될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셋을 묶어둘 계책을 세운다. 12월 12일 이들을 전두환이 술자리에 초대해놓고 그사이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체포하려고 하는 술책이었다. 이것이 바로 작전명 생일집 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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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12월 12일 셋은 연희동 술자리에 모여 늦는다고 한 전두환을 기다리며 술을 먹고 있었는데, 이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체포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부대가 있는 수경사, 육본, 특전사로 떠난다.     

 

정병주는 특전사령부에 도착하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부부터 알아보았다. 그런데 일은 상상이상이었다. 자신이 정말 친동생처럼 아꼈던 부하들 박희도 1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 장기오 제5공수여단장이 전두환의 쿠데타 세력에 합류 했다는 것이다. 

이에 정병주는 부대파악을 한 후 당시 특전사 부사령관인 이순길 준장으로 하여금 1공수를 막으려 했다. 이때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병력출동을 하려 한다, 그런데 믿을 수 있는 병력이 없다'라고 말하자 정병주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9공수 윤흥기 준장으로 하여금 출동을 명한다.  그리고 보안사는 물론 30경비단까지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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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안사령부는 말그대로 모든 군에 감청 시스템이 있었다. 이를 활용해 9공수여단이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급하게 정병주의 직속부하이자 제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에게 정병주 체포를 명령한다. 이에 최세창은 정병주를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자신의 부대 대대장 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를 명령한다. 당시 특전사령부는 이미 제3공수 안에 속해 있었던지라 박종규 중령과 병력은 쉽게 사령관실을 공격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사령관 김오랑 소령은 이를 혼자 막다가 전사하였고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부상을 입고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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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9공수여단과 정병주의 부하들

김진기 헌병감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체포된줄 모르는 상황에서 서울로 진군하던 9공수여단을 막기 위해 쿠데타 세력은 1여단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 윤성민 국방부 차관으로 하여금 두 공수여단이 서울에 맞붙는다면 그 피해가 엄청 날것이라며 신사협정을 제의했다. 이에 9공수여단은 진군을 멈추고 원대로 복귀했지만 1여단은 그대로 서울을 장악하며 쿠데타의 성공을 알렸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엄청난 배신을 당했다. 한때, 무장공비를 막지못해 보직해임을 당한 박희도를 무릎까지 꿇으면서 막아주었지만 박희도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쿠데타 세력에 동조했고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은 심지어 정병주 사령관의 체포를 명령했다.둘다 추후 국방부 장관에까지 오르며 승승장구를 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명령을 끝까지 따른 제9공수특전여단 윤흥기 준장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홀로 맞서싸운 김오랑 소령은이 있었지만 윤흥기 준장은 1212사태 이후 경질되었고 김오랑 소령은 당일 흉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 세력들이 승승장구를 하게 된 것이다. 

4.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의혹 가득한 죽음

 

1212사태 이후 바로 강제 예편을 당한 정병주 사령관은 지속적으로 1212사태에 대한 부당함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 정병주는 옷을 입고 후배들이 보자고 했다며 집을 나선다. 그리고 실종되어 1989년 3월 의정부의 한 야산에서 목을 매단 변사체로 발견된다. 실종된지 5개월만이었다. 

그의 큰 덩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굵지 않은 나뭇가지에 목을 매단 것이다. 조사 결과는 자살이었다. 그러나 정병주 소장과 함께해온 동지 장태완 소장은 그는 자살을 죄로 여기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며 1212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하려 했고, 역사의 증인으로 남겠다며 몸 조심하자는 말을 곧 잘 해왔다고 전해진다. 다시 말해 자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를 찾아가 위로하고 남편의 억울함을 풀겠다고도 말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자 백영옥 여사는 적극적으로 1212사태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나섰지만 1991년 6월 실족사로 그녀마저 죽게 된다.

현재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현충원에 안장되어있으나 비석의 내용이 하나 없는 백비로 되어 있다. 그야말로 참군인의 안타까운 죽음인 것이다. 


1212사태로 자신의 직속부하들에게 배신 당하고 치욕을 겪어야 했던 정병주 사령관 그러나 그는 불의에 절대 타협하지 않고 군부쿠데타를 막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군인이었다. 추후에라도 반드시 그의 죽음에 하나의 의혹도 없이 모든 것이 밝혀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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