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1212 쿠데타 세력에게 납치되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3. 11. 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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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 세력에게 납치되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그는 누구인가?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게 있어 성공의 포인트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의 납치였다. 1026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그는 과연 누구일까? 

 

1. 6.25전쟁과 5.16군사정변 이후 탄탄대로를 걷는 정승화

영화 서울의봄에서 정승화 역을 맡은 배우 이성민 , 이전의 남산의부장들에서는 박정희 역이었다.

 

정승화는 1929년,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나 1930년 본가인 경북 김천에서 크고 자랐다. 그가 처음 군에 입대한 것은 1947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의 5기생으로 입학하면서부터인데 이후 바로 소위로 임관한다.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지금의 백골부대의 대대장으로 참전하였고 낙동강전투, 현리전투, 경주전투 등을 치뤄냈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육군 방첩부대장을 역임하면서 국가채건최고회의 최고의원에까지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가 32살이었으니 믿겨지지 않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후 내노라 하는 부대들을 두루 거치면서 그야말로 군인으로써는 탄탄대로를 걷는다. 여기에 당시는 왜그런지 모르겠지만 대한체육회 이사, 문교부 체육심의원까지 맡으며 군인으로서 다양한 경력을 가지기도 했다.

2. 10.26사태 이후 정승화

 

1979년 2월 그는 군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인 육군참모총장의 자리로 영전한다. 그러나 불과 8개월 후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는 10.26사태가 일어나며 그의 인생 역시 폭풍속으로 빨려들어간다. 

10.26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한 김재규는 박정희와 연회가 있었지만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약속을 잡고 궁정동으로 부른다.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가'동에 있었는데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할 당시 정승화는 김재규를 만나지 못하고 중앙정보부 2차장인 김정섭과 '가'동에서 식사를 한다. 이후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고 정승화를 같은 차에 태우고 육군본부에 갔는데 이때 당시만해도 정승화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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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에 도착해서야 정승화는 박정희가 피살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를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하며 자세한 경위는 김재규에게 물어보라며 둘러낸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벌어질 1212사태에서 전두환 쿠데타 세력으로 하여금 명분을 줘 자신이 납치되는 대표적인 원인이 된다. 

3. 1212사태로 납치 연행된 정승화

 

여튼 10월 27일, 국가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며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계엄사령관은 정승화가 맡게 되고 김재규를 체포하고자 했지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후 11월 대권 문제가 떠올랐고 당시 군부의 실세로 자리잡아버린 전두환, 노태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증, 김영삼 등과 협력하라는 권유를 듣긴 했지만 오히려 정승화는 김대중, 김영삼 등을 비판하며 야당과는 전혀 협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전두환은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누구보다 먼저 당시 군권을 지니고 있는 정승화를 납치 연행한 후 김재규와 쿠데타 모의를 한 죄를 덮어씌운다. 당시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12월 13일 바로 해임되고 강제 예편 후 이등병 신분으로 전두환의 본거지인 보안사령부로 압송된다. 이후 모진 고문까지 당하며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그는 내란방조미수죄로 10년형을 선고 받고 군 교도에서 복역하게 된다. 한 나라의 최고 군권을 가진 사람이 이등병으로 가게 된 것은 정승화에게는 어마어마한 치욕이었다. 

이후 전두환이 실권을 잡은 1980년 6월 형집행정지를 받고 석방되었다가 집행유예로 바뀐다. 그 후 81년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 사면을 받아 출소한다.

4. 1212사태 이후 정승화의 행적

 

정승화는 출소한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1987년 6월 항쟁 후 직선제로 치뤄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하면서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것 같은 상황이 이어지고, 김영삼이 삼고초려로 정승화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하면서 전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노태우가 당선이 되었고, 정승화는 정치에서 손을 뗀다. 이후 이등병으로 강등된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육군 대장 자격을 다시 찾게 된다. 그리고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의 증인으로 서 1212사태의 피해자로 증언을 하게 된다. 

1993년 장태완, 김진기 등 쿠데타를 막으려 했던 군인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을 고발했지만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며 기소유예처리 했고 오히려 쿠데타 세력은 정승화를 무고혐의 등으로 고소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고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정승화의 억울함이 풀리는 듯 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2년만에 사면하면서 분노했다. 1999년 70세에 장성출신 예비역모임인 성우회에 회장으로 당선되어 쿠데타로 인한 피해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다 2002년 6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육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지금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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