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쿠데타는 안돼! 12·12사태를 막으려 했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윤여시 2023. 10. 30.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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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는 안돼! 12·12사태를 막으려 했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과 함께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돌아올줄 알았지만 손에 잡힐 듯 했던 자유는 다시 한 번 전두환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인 1212사태와 함께 군부의 손으로 돌아간다. 물론 이때 모든 군부가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쿠데타를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 여기 장태완이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장태완역의 성우 김기현

|1212사태 이전 - 장태완의 출생과 군시절 

장태완은 1931년 생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났다. 그가 스무살이었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단기 장교 양성소였던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고 소위 11기로 임관 했다. 이후 월남전에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파병을 다녀왔고 육사가 아님에도 수도경비사령부의 참모장의 자리까지 오른다. 이때 육사 출신이고 하나회에 끈만 믿고 반항하던 당시 김상구 방공포대대장을 영창으로 보내는데 이일로 인해 하나회의 간부들과 김상구의 손윗동서 전두환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장태완은 소장 진급으로 별을 달고 제26보병사단장을 떠났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한 1979년 10월 26일로부터 한달뒤인 1979년 11월 16일 수도경비사령관 자격에 임명되었다. 1212사태가 일어나기 채 한달도 안남은 시점이었다.

 

영화 서울의봄에서 장태완 역의 정우성

|1212사태 일어나다 

다음은 1212사태를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직접쓴 당시의 수기를 바탕으로 한 글이다. 

 

1. 1212 사태 일어나기 직전 

1212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전두환은 헌병단장 조흥 대령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장태완 사령관, 특전사령관 정병주, 헌병감 김진기 장군과 함께 단합 만찬을 하자"고 말이다. 이에 장태완 사령관은 조흥 대령이 장군을 모시고 인사청탁을 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미심쩍어 하며 그런 인사청탁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조흥 대령은 절대 그런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전두환이 쿠데타의 방해되는 인물들을 한데 유인한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은 것이다.

 

2. 12월 12일 18시

장태완은 드디어 전두환과의 약속을 위해 연희동으로 떠난다. 장태완이 도착해보니 그 자리에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우국일 보안사령부 참모장이 와 있었으나 만찬을 주최한 전두환은 보이지 않았다. 부하들이 전두환은 대통령을 만나고 8시쯤 온다는 소리에 장태완은 일행과 방으로 들어왔더니 조흥대령이 여자들을 데리고 맞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장태완은 그자리에서 화를 내었으나 술자리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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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2월 12일 19시 40분
김진기 헌병감이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더니 참모총잔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배후는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을 한다. 이에 장태완과 정병주 장군은 바로 차에 올라타 상황실로 출발한다. 이때 장태완은 직감적으로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조흥 헌병단장에게 슬쩍 물어보니 "북괴 소행인 것 같습니다"라며 머뭇머뭇거렸다. 이후 알아보니 조흥은 쿠데타 성공인 8시 30분까지 술로 당시 장소에 있던 장군들을 만취시키고 붙잡아 두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4. 12월 12일 20시 
밤 8시경 부대상황실에 도착하기 전 전 단장은 상황실로 집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하나회 멤버인 장세동, 김진영, 조흥까지도 모두 모이지 않았다. 이에 장태완은 직감적으로 하나회 멤버의 소행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잠시 제쳐두고 서울 외곽 19개 검문소 강화 및 총장님 구출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외 모든 연락망이 불통이라 상황을 알 수 없었다.

5. 12월 12일 21시
이후 총장을 구출하는 특공대를 파견하고 상황파악에 전념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산발적인 사격소식만 있던 상황이었다. 장태완은 밤 9시경 지하 상황실로 들어가 참모장으로 부터 드디어 상황을 보고 받았는데 결과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물론 황영시 1군단장, 수도권 방어임무를 담당하는 차규헌 수도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제9사단 노태운 사단장 이하 수많은 육사 하나회 멤버들이 모두 쿠데타에 가담한 것이다. 

 

이에 장태완이 30단장 장세동 대령 전화로 호출하니 유학성 군수차관보가 받았다. 자신보다 선배인지라 장태완은 이렇게 말한다. 

 “아, 유선배님! 거기 왜 갔어요? 나도 밤에는 특수한 경우 외에는 그곳을 출입 않는데 여럿이 모여서 뭐하고 있는 것예요? 모든 것을 감쪽같이 묵인할 테니 돌아가시고, 총장님을 어서 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지금 국민들이 이러한 군부의 동향을 알면 어떻게 할 셈이요? 제발 빕니다. 선배님!”

이에 유학성은 “여봐 장태완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리 와서 우리하고 일 좀 같이 해” 라고 말했다. 

이에 장태완이 욕설을 퍼붇자 황영시가 대신 받더니 다시 한 번 회유를 한다. 평소에는 황영시와 좋은 사이었던 장태완은 정승화 총장을 보내달라며 말을 했지만 계속된 회유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후 장태완은 어떻게든 이들을 막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당시 수경사의 모든 통화는 보안사에 의해 감청되었고 수경사의 전투 핵심병력은 장세동과 김진영 등 쿠데타 주축세력에 의해 없어진 뒤였다. 유사시 자신의 부대로 배속받을 수 있었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 26기계화사단 역시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사라져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에 쿠데타 세력을 막기 위해 내려온 제9공수 여단 역시 회군 명령에 의해 어이없게 돌아가면서 장태완은 아무런 병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취사병, 행정병을 싸그리 모아 전투하려 했으나 쿠데타 세력에 비할바가 못되었고 장태완은 결국 붙잡혀 서빙고에서 45일간 조사를 받고 군에서 쫒겨났다. 이후 장태완의 아버지는 반란을 막지 못한것에 통탄하며 식읍을 전폐하고 막걸리를 먹다가 1980년 4월 과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82년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외동아들 장성호 역시 행방불명되었다가 1달만에 칠곡군 왜관읍의 한 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1212사태 이후 장태완의 인생 

전두환 정부 때인 1982년 한국증권전산 회장을 하고 민주화 이후 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어 재향군인을 이끌다가 2000년 3월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2002년 노무현 대통형 후보의 보훈특보를 지냈다. 이후 2004년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 선언하고 2010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2년뒤인 2012년 그의 아내 이병호 여사 역시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수경사령관 장태완 그는 당시 전두환과 그가 속한 하나회의 쿠데타를 막고자 했던 참군인이었다. 그렇기에 장태완은 제 5공화국을 배경으로한 수많은 작품속에서 강직하고 당당한 군인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가 쿠데타군에게 일갈했던 대사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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