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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전략가? 선거판의 여우, 킹메이커의 모티브 엄창록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2. 1. 17.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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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전략가? 선거판의 여우, 킹메이커의 모티브 엄창록 그는 누구인가?

대선과 곧 이어질 지방선거의 해가 밝으면서 연일 각 후보들의 선거 전략에 대한 분석과 기막힌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야말로 표를 놓고 벌이는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우리나라 선거판의 귀재이자 여우라 불렸던 인물이 있다.

 

여우 같은 선거 전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엄창록...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영화 킹메이커의 모티브가 된 인물 엄창록에 대하여 알아보자   

 

|엄창록, 김대중의 선거 참모가 되다

엄창록은 함경북도 출생으로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심리전을 맡은 북한 하사관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우익으로 전향을 한 엄창록은 강원도 인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다가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한 김대중을 당선시키며 김대중의 비서로서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강원도 인제하고는 하등 인연이 없던 김대중을 출마 시킨게 엄창록이라는 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 된 김대중은 이후 2년뒤 벌어진 1963년의 총선에서도 재선이 되는데 이때도 엄창록이 큰 역할을 했다. 


이후 1967년 총선이었던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대중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엄청난 지원을 받은 김병삼을 이기고 다시 한 번 국회의원을 달게 된다. 이때 박정희 정권은 야당의 대세가 되어버린 김대중이 눈엣가시였던지라 관권, 금권 선거 등 모든 불법전략을 구사하며 어마어마한 선거 지원을 했음에도 엄창록의 기가막힌 선거전략을 바탕으로 김대중은 선거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때 엄창록의 선거전략은 다음과 같다. 

 

엄창록은 상대방의 표를 빼앗는 감표작전을 최우선하며 진행했다. 

1. 선거원들을 공화당원으로 위장시켜 설탕봉투를 전달 한 후 다시 빼앗아가기
2. 공화당원으로 위장해 양담배를 건네며 태도 불량한 모습 보이기 
3. 공화당원으로 아주 소액이 든 돈봉투를 건네며 유세 떨기
4. 공화당원이라 밝히고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단체들을 불러 놓고, 예약도 잡지 않음

 

|1971년 대선 신민당의 대선 후보로 김대중을 올려 놓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정희를 견제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신민당의 김영삼이 유력 주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신민당 경선에서 엄창록은 김대중을 신민당의 대선 주자로 만드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된다.

 

엄창록의 선거 전략은 상대방의 표를 빼앗아 오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네거티브 작전에 주력했다. 엄창록은 김영삼과의 신민당 경선에서 김대중으로 하여금 말단 대의원들을 포섭하는 전략을 쓰는데, 당시 선거 상식으로는 신민당 내부의 표를 얻기 위해서는 지구당위원장을 포섭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었던 때라 상당히 파격적인 전략이었다. 

엄창록은 최초로 점조직을 만들어 선거에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점조직들이 활동하며 김영삼의 텃밭이었던 영남의 대의원들까지 포섭하게끔 역할을 해냈다. 이 같은 엄창록의 활약으로 박정희를 대적할 신민당의 대선 후보로 김대중이 오를 수 있었다. 

 

|1971년 대선 중 김대중을 떠나 박정희에게 가다

1971년 대선, 김대중의 바람이 불며 박정희를 위협하던 도 중 대선 열흘을 앞두고 엄창록이 김대중을 떠난다. 김대중 자택에서 폭발물이 터지는데 이를 엄창록이 벌인 자작극이라며 당시 중앙정보부가 몰아갔고 가족까지 조사하는 협박성 짙은 조사 끝에 엄창록은 어쩔 수 없이 김대중을 떠나 실종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박정희가 당시 인구로 압도적인 경상도를 텃밭삼아 호남과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지역감정 선거를 실시하기 시작한다.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영남에 빼앗긴 대통령 호남인이 찾아오자'라는 전단지들이 영남지역으로 대규모 살포가 되고, 이를 본 영남인들은 지역감정에 매몰되어 박정희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다. 실제 1971년 대선은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 이용된 선거로 잘 알려져 있다. 

선거는 결국 90만표라는 작은 표 차이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다시 한 번 당선이 되었는데, 이때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이 같은 지역감정을 부추긴 전략이 엄창록의 작품이라고 강하게 의심했다. 물론 지역감정을 부추긴 것이 확실치는 않으나

그 동안의 엄창록의 행적과 선거전략 등을 볼 때 충분히 의심살만한 일이었다. 물론 엄창록은 이를 부인 했다고 전해진다. 

 

여튼 1971년 대선을 기점으로 엄창록은 김대중이나 동교동계를 만나지 않고 피해다녔다고 전해진다.

 

엄창록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킹메이커>

|노태우 엄창록에게 선거 전략을 부탁하다 - 엄창록의 죽음

1971년 이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엄창록에게 1987년 노태우가 선거를 앞두고 엄창록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엄창록은 김대중, 김영삼이 모두 나왔다면서 그러니 노태우가 당연히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선거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987년 12월 대선은 노태우의 승리였고, 엄창록은 대선 직후 1988년 호흡기 질환으로 인해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엄창록의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선거사에 분명 한획을 그은 인물로 마타도어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로 불렸으며 김대중의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까웠던 인물'로 평가하였고 박정희는 그의 선거보고서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등 대단했던 인물이다. 

 

이번에 개봉할 영화 <킹메이커>에서 그의 활약을 모티브로 삼아 재구성하였다고 하니 선거가 줄지어 있는 올해를 생각하며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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