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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그는 누구인가? 바라보는 견해

윤여시 2020. 1. 1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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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그는 누구인가? 바라보는 견해

이승만때부터 이어져온 우리나라의 기나긴 독재의 역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분명 긍정이든 부정이든 많은 역사적 평가를 감당해야 하는 대통령일 것이다. 그리고 기나긴 박정희 독재 정권을 끝내버린 김재규 역시 그만큼 다양한 역사적 평가를 감내해야 하는 인물 중 하나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그는 과연 누구이며 그를 바라보는 견해는 어떻게 다를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되기까지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고향인 경북 구미 출신인 김재규는 어렸을 적, 정미소를 운영했던 아버지 덕에 부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3년 안동농림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 특별 간부 후보생 출신으로 육군에서 근무하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잠시 교직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으로 입교하여 박정희를 만나게 되고 고향은 물론 교사 이력까지 같아,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다. 임관 후 미 육군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면직 당해 다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 다시 복직한 김재규는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훈장을 받고 3사단 22연대 제2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가 그 부임 당일날 6.25전쟁이 일어나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6.25때 의정부, 대구, 영덕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고 북진의 선봉으로 함경남도까지 올라갔다가 남으로 후퇴한 후 여수 제2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다가 국방부 총무과장 재임 중 박정희의 5.16군사 쿠데타가 발발했으나 가담하지 않아 혁명군사령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암살 계획을 세웠던 1968년 1.21사태 이후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였고 보안사령부로 개편하여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1973년 육군 중장 전역이후 유신정우회 1기로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차장이 되었으며, 1974년 9월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이후 1976년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주도한 10.26사태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라는 끈끈한 인맥으로 심복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와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을 권총으로 저격한 10.26사태 이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1) 차지철과 갈등이 심했던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거하면서 박정희를 암살했다는 설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은 단순히 경호실장을 넘어 오만과 월권행위가 극에 달아 있었으며 박정희가 차지철을 두둔하고 그 앞에서 김재규를 꾸중하는 일도 발생하자 김재규가 계속 참다가 폭발하여 10.26사태를 주모했다는 것이다. 

2) 민주화에 대한 요구 
김재규가 주장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이유는 바로 민주화다.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하여 기나긴 유신독재를 마무리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하면서 독재를 끝내기 위해 박정희를 암살 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3) 미국의 사주 
박정희와 당시 미국 대통령 지미카터 대통령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독재정치를 계속 이끌어오던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김재규에게 사주를 해 암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설 모두 확실치는 않으며 전두환이 바로 쿠데타를 일으켜 재판을 신속히 집행하고 김재규와 그 주모자들을 사형시킴에 따라 모두 확실치는 않다고 할 수 있겠다. 

 

|10.26사태 그 이후 김재규의 행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을 죽이고 김재규가 이동한 곳은 이상하게 육군본부였다. 많은 전문가들이 바로 이때 김재규가 육본이 아닌 자신의 거점인 중앙정보부로 이동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10.26사태가 발생한 궁정동 안가는 완벽하게 중앙정보부의 통제 안에 들어간 곳으로 마음만 먹으면 박정희를 죽인 사실을 은폐하고 자신의 반대세력에 덮어 씌우는 행동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차지철의 행패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던터라 쿠데타가 일어나면 차지철일 것이다라는 추측들도 돌고 있었기 때문에 차지철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정권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김재규는 자신이 힘을 발휘 할 수 없는 육군 본부로 이동했다. 그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1) 육군본부를 통해 군부를 장악하려 했다는 설
대통령이 죽고 권한이 특별히 없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떤 정승화가 김재규와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군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충복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김재규는 이렇다 할 군부인맥도 없었기 때문에 판단 착오라는 점이다.

2) 박정희를 우발적으로 살해해서 패닉상태였다는 설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우발적으로 살해하여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패닉에 빠져 판단착오를 했다는 설이다. 수사결과에 의하면 김재규는 정승화와 동행하여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고
정승화가 육군본부로 가는게 좋다고 하면서 그냥 갔다는 점이다. 이때 정승화는 박정희를 김재규가 죽였는지 몰랐었으며 김재규가 육본으로 갈 때 신발도 없어서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었다는 점에서도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김재규의 체포 그리고 사형

 

육군본부로간 김재규는 그곳에서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에 의해 체포되었고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이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을 장악하게 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후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4일만인 5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후 김재규를 바라보는 시선은 긍정평가와 부정평가로 크게 나뉜다. 

 

1) 긍정평가 

말년에 흔들리긴 했으나 결국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박정희 유신독재정치를 마무리 하게 했다는 점이다. 김재규의 말대로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이 나섰다는 견해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의사 혹은 열사로 칭하며 긍정적인 평가가 따른다. 

 

2) 부정평가 

어쨌든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장관과 중앙정보부장을 하다가 차지철에게 밀려 우발적으로 암살한 견해를 믿는 사람은 단연 김재규를 좋게 보지 않는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과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들 역시 김재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김재규... 우리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 암살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낸 인물이자, 결과가 어찌됐든 기나긴 독재정치를 끝내고 민주주의의 씨앗을 위해 총을 들었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당신의 평가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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