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전투기를 몰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북한 조종사 이웅평 귀순 사건

윤여시 2022. 8. 1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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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를 몰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북한 조종사 이웅평 귀순 사건

지금도 북한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굶주리게 하는 독재정치 때문에 많은 탈북자들이 귀순을 결심하고 대한민국으로 향한다.

그런데 수많은 탈북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귀순 사건은 무엇일까?  바로 조종사로 북한 전투기를 몰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군인 이웅평이라 말 할 수 있겠다. 과연 어떤 사건이었을까?

실제 북한 조종사 이웅평 모습

|이웅평의 귀순 결심은 삼양라면 때문?

1954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사회안전부 소좌 리광정과 맹성월 부부의 2남 5녀 중 장남이자 셋째로 태어난 이웅평은 아버지가 소령 계급의 군인인 관계로 유년시절 다른 북한 국민처럼 굶거나 못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 된다.

이웅평은 북한의 손꼽히는 대학인 김책공군대학을 나와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걷게 되며 이후 조선인민군 공군의 비행사로 근무하게 된다. 그는 공군으로 복무하면서 북한 정치의 억지와 국민이 굶주리는 모습에 실망하기 시작했고 몰래 몰래 목숨을 걸고 남한 방송을 듣는 등 점차 남한 귀순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또한 자신 역시 나름 고급인력임에도 배급받은 석탄으로 하루를 보내야 했고 이는 곧 공산주의의 맹점이며 시장경제를 이길 수 없겠다는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귀순을 결심하게 된다.

<삼양라면 이야기>

이웅평이 남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무렵, 함경북도 바닷가에서 우연히 이상한 봉투를 줍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삼양라면 봉지였다. 당시 이웅평은 라면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포장지에 쓰여진 글을 천천히 읽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식품에는 모두 쓰여 있는 "판매나 유통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대리점에서 교환해드립니다"라는 글이었다.

이웅평은 이 문구가 충격이었다. '남한은 이런 세세한거 하나까지도 소비자를 생각하는데 지상낙원이라 선전하는 북한은 무엇이란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같은 사건이 남한으로 향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후 이웅평은 인터뷰 과정에서 본인은 이러한 말을 한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많은 설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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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고급인력임에도 배급받은 석탄으로 하루를 보내야 했고 이는 곧 공산주의의 맹점이며 시장경제를 이길 수 없겠다는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귀순을 결심하게 된다.

1983년 3월 4일 열린 귀순용사 이웅평 기자회견

|이웅평 귀순 당일

1983년 2월 25일, 한국은 미국과 팀스피릿 훈련 (냉전 당시 미군과 국군의 합동 군사훈련, 한반도에서 발발하게 될지도 모르는 군사적인 돌발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연례적으로 실시했던 한·미 양국군의 연합군사훈련)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북한 역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태세를 유지중에 있었다.

해서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에서는 이웅평 조종사가 포함된 mig-19 편대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이때 이웅평은 갑작스럽게 기수를 돌려 편대를 이탈하고 대한민국을 향한다.

그는 북한의 추격 편대를 따돌리려 저공비행을 실시하고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50~100m를 유지하며 전속력으로 남한을 향한다. 불과 15분만에 황해남도 해주 상공을 거쳐 DMZ를 뚫고 우리 군의 영공인 연평도 상공으로 넘어온다. 여기에 우리나라 F-5편대는 북한의 도발인줄 알고 즉시 출동하였는데 이때 이웅평은 자신의 mig-19의 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귀순 의사를 밝힌다.

그제서야 F-5는 이웅평의 미그기를 유도해 수원비행장에 착륙시킨다. 그의 귀순 당시 놀란 민방위 관계자가 북한 전투기가 우리를 폭격하러 온다고 국민들에게 경계경보를 발령하였고 덕분에 우리 국민은 이웅평의 귀순 사건을 더 빨리 알게 되었다.


한편 이웅평을 수원 비행장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한 박종헌 공군 소령은 이후 제32대 공군참모총장(2010~2012년 재임)을 지내고 공군 대장으로 퇴역하였다.

|이웅평 귀순 후 대우

이웅평 소령은 당시 북한의 무기를 가지고 오면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한다는 법률을 통해 그가 가져온 당시 미그기-19로 15억 6천만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2022년 지금 기준으로 약 60억 정도 되는 가치라 할 수 있겠다. 당시 최고급 아파트인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천만원이었으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이라 할 수 있겠다.

이웅평 소령의 당당한 모습에 우리나라 국민들 역시 열렬히 받아주었고 그는 대한민국의 공군 소령으로 임관되었으며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북한의 소식통에 따르면 이웅평 소령의 가족들은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고 부모는 처형 되었다고 전해져 괴로워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웅평의 생애

이웅평은 공군에서 계속 근무하며 1996년 대령 진급 및 공군대학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97년, 43살의 젊은나이에 갑작스러운 간경화로 쓰러져 간이식수술을 받게 된다. 이후 회복하는가 싶더니 간이식 거부반응이 일어나 2002년 5월 4일 48세의 젋은나이로 눈을 감는다. 지금은 대전현충원 장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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