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안옥윤 실존인물? 남자현 지사 독립운동가는 누구인가?
영화 <암살>에서 여걸 항일 독립운동가로 전지현이 맡은 인물 안옥윤, 사실 이 안옥윤이 모티브로 한 실존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남자현 지사이다.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 하면 으레 떠올리는 인물이 유관순이지만, 유관순보다 30살이 많은 40대의 나이에 오직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길로 접어든 남자현의 모습만큼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누구인가?
1. 남자현 지사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전까지
1872년 12월, 남자현은 지금의 경북 영양군 석보면에서(생가 위치, 남자현 지사의 후손들은 안동이라 이야기하고 있음.) 1남 3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꽤 높은 벼슬자리였던 정3품 당상관이었던 통정대부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기도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당시 일반 여성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학문을 접할 수 있었고, 남자현 역시 타고난 똑똑함과 지혜로움으로 학문이 나날이 발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7살에 한글을 배우고 14살 때 사서를 독파하였으며 시를 지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단순히 학문뿐 아니라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학문을 배워가며 당시 조선에 대한 애국심 등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열아홉이 되던 해, 당시 아버지의 제자 중 한명이었던 김영주와 결혼하였으나 1896년, 결혼한지 불과 5년만에 남편은 을미의병으로 싸우다가 전사한다. 이때 아버지 역시 의병을 일으켜 싸우던 의병지도자였을뿐 아니라 남편마저 죽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항일에 대한 불씨를 품게 된다.
남자현은 동시에 어머니로서 3대 독자 김성삼을 낳아 돌보는 한 편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까지 온 마음을 다하여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효부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남자현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접어든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1919년 3.1운동 때문이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47살이었지만 서울 신촌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누구보다 앞서서 만세를 외쳤다. 이후 남자현은 만주로 향했으며 춥고 어두운 만주 벌판에서 그녀의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2. 남자현 지사 독립을 향해 내달리다
1919년 3월 새벽 아들과 함께 장사꾼으로 변장한 뒤,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도착한다. 남자현 지사는 그녀의 고향이었던 당시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룡과 김동삼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들 모두 당시 만주에서 서로군정서를 이끄는 지도자이자 신흥무관학교 등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단 독립군의 주요 인사였다.
남자현 지사는, 독립군과 함께하며 농사는 물론 교육사업을 전개하였고 교회를 세워 계몽사업과 문맹 퇴치에도 앞장섰다. 또한 여러 크고 작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독립군을 돌보았고 치료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등을 통해 남자현 지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청천 장군이 군사위원장으로 있는 정의부의 중앙 여성대표로 추대 된다.
- 끝없는 일제 간부들을 향한 암살시도와 남자현 지사의 죽음
남자현 지사가 만주의 독립활동을 넘어 다시 역사에 이름을 새긴건 1926년 4월, 당시 일본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기 위하여 국내에 잠입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승하 시기를 맞춰 조문을 하러 올 창덕궁 금호문에서 사이토 마코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사 직전에 다른 독립 투사인 송학선 의사 역시 암살을 하고자 나섰다가 다른 고위간부를 저격하면서, 일제의 경계가 철통보안으로 바뀌게 되고 이 암살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남자현은 다시 중국 길림으로 돌아간다.
일본이 세운 만주국이 건립 1주년 되는 해인 1933년 3월, 이번에는 일본의 만주국 대사였던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기 위해 투입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거사직전에 내부 밀정의 고발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하얼빈 감옥에 투옥된다. (이 때, 그녀가 입던 옷이 그 옛날 전사했던 자신의 남편의 군복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감옥에 갇힌 그녀는 하얼빈 감옥에서 치욕스럽게 사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면서 단식투쟁을 하였고 17일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자행되던 혹독한 고문과 단식으로 그녀의 몸은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겨우 풀려났지만, 5일만에 아들 김성삼과 손자가 보는 앞에서 1937년 3월,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 남자현 지사의 유언과 독립자금 '248원'
남자현 지사는 죽기직전, 아들과 손자에게 자신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했지만 만약 독립을 하게 되면 독립 정부의 축하금으로 전달해달라고 하며 248원을 건냈는데, 이는 지금으로 따지면 약 3,500만원 정도의 돈이었다. 그리고 이 돈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다음해인 1946년 3.1운동 기념식에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되게 된다.
3. '세 손가락 여장군' 남자현 지사
남자현 지사는 세 손가락을 자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한 번에 세 손가락을 자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건마다 그 이유가 다르다.
- 엄지를 자르다
만주로 건너간지 1년이 지난 1920년 8월, 국치일 기념대회 때 독립군 지도자와 독립군들이 모인 강당에서 그녀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다. 나라를 잃은 안타까움과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를 담아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반드시 승리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를 본 당시 독립군은 그녀를 보고 오열하는 한편 조국 독립의 강한 의지를 다진다.
- 검지를 자르다
1922년, 당시 만주에 있던 독립단체끼리 이해관계가 엮이면서 충돌이 있었다. 남자현은 이를 보고 같은 독립단체가 적인 일본을 두고 서로 싸우고 있다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검지를 잘라 독립군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이때 그녀에게는 3개의 손가락만이 남아있다하여 독립군들을 그녀를 '세 손가락 여장군'이라는 별명을 불렀다고 한다.
- 약손을 자르다
1932년, 일제의 야욕이 조선을 넘어 중국을 넘보기 시작하면서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침공을 공식화한다. 이에 중국이 일본의 말도 안되는 행동에 분노하여 당시에도 존재하던 국제연맹에 합동조사단을 부르길 원했는데, 이에 당시 영국의 리튼 경을 단장으로 한 리튼조사단이 중국에 들어온다.
남자현은 이 같은 소식을 듣고 리튼조사단에 조선의 현실을 전하고자 그녀는 약손가락을 잘라 백지에 혈서로 조선독립원이라는 글자를 써서 손수건에 감싸 보낸다. 그러나 이때 리튼조사단을 경비하는 경계가 너무 강해서 아쉽게 혈서가 전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4. 남자현 지사 '건국훈장 대통령상' 추서
남자현 지사의 독립을 향한 열망은 그녀가 죽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차지한 후 다시 재조명된다. 1962년 3월 1일, 남자현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는다. 이때 이름만 들어돌 알법한 지청천, 이봉창, 김동삼 등의 독립유공자와 함께 받았으며 건국훈장 대통령 상은 독립유공자가 받는 훈장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이곳에 추서된 여성은 남자현 자사가 유일하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묻혔던 남강 유역의 묘지 구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나라는 1967년 국립현충원에 유해 없이 가묘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윤옥의 모티브가 된 남자현 지사의 삶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한 사람의 아내로서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 그 어떤 편안한 부귀영화도 버리고 오직 조국을 위해 그 차디찬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의 일원으로서 싸웠고, 또 원수같은 일제의 주요 간부들을 암살하려 여성의 몸을 이끌고 나갔다는 것을 보면서 왜 그녀가 우리나라 여성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남자현 지사 그녀의 독립에 대한 꿈과 나라에 대한 애국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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