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병자호란 청나라 태종 홍타시정묘호란 병자호란 청나라 태종 홍타시

Posted at 2014. 8. 29. 00:02 | Posted in 세계사/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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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병자호란 청나라 태종 홍타시


조선의 역사 중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을 뽑으라면 언제를 뽑겠는가? 아마도 일제강점기 다음으로 조선의 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고두례를 취하며 처절한 항복을 취하였던 병자호란을 생각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큰 치욕을 안기고 백성들의 수탈을 좌시해야만 했던 병자호란 그리고 그를 지시한 청나라 태종 홍타시, 그는 과연 어떻게 조선을 침략했을까?




 

영화 <최종병기 활>은 양 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묘호란 일어나다.


청나라 제 1대 황제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고 20년 후 반명의 기치를 내걸고 명나라 무순을 함락하자 명나라에서는 놀라 후금을 물리칠 군사를 모으게 된다. 


이떼 명나라는 너무 커버린 후금의 무서움을 알게되고 광해군 11년,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이때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을뿐 아니라 조선 개국 때부터 친명정책을 취해 왔기 때문에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1만 5천의 군사를 주어 명나라를 돕게 한다.


그런데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을 은밀히 불러 "명군에 속해 출진하되 대세를 보다 우세한 쪽에 가담하라" 라고 지시를 하고 후금이 명군을 압도하자 강홍립은 이내 후금에 항복한다.


물론 이 같은 광해군의 실리 외교 때문에 광해군은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되는 명분을 허락하게 되고 청 태종인 홍타시가 즉위했을때는 이미 조선에서도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청나라 태종 홍타시 조선땅을 짓밟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은 광해군의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외줄타기 하던 실리 외교를 버리고 당시 정세를 읽지 못해 무너져가는 명나라에 다시 기대는 외교를 택하게 된다.


이에 청 태종 홍타시는 조선의 이 같은 행동에 조선을 무너트려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또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조선의 영토 경계선인 압록강 하구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후금을 견제 하였기 때문에 조선과 명의 연합을 신경쓰던 청 태종 홍타시는 1627년 즉위하자마자 조선에 공격을 명한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후금 군대는 단숨에 명나라 모문룡 부대를 습격하고 의주를 무너트린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 두려움에 빠진 인조와 조정은 결국 강화도 피난길에 오르고 다 무너져가는 명나라에 도움을 다시 요청한다. 물론 명나라 역시 후금과 싸울 전력이 아니었기에 조선을 도와줄 수 없었다.


다급해진 조선은 후금과 조건부 화친을 맺게 되는데 그 화친 조건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였다.


1.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국이 된다.


2. 조선은 금나라와 화친하는 동시에 명나라와도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  




 

청나라 태종 홍타시의 조선 친정


|병자호란 일어나다.


슬슬 자신의 시대가 왔다고 느낀 홍타시는 1636년 마침내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정묘호란 당시 조선과 형제의 나라로 맺었던 화친 조약을 파기하고 임금과 신하의 나라에 대한 예를 갖추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나라를 방문한 조선 사신들은 청 태종 홍타시를 향한 배례를 거부하였고 이에 본보기로 조선 사신의 목을 베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청 태종은 이를 거절하고 조선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를 묵살하였고 홍타시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의 압록강을 건넌다.


14일만에 한양의 코 앞에 다가온 청태종 홍타시의 군세에 조선 조정은 두려움에 떨었고 다시 한 번 인조는 강화도 몽진길에 오르려고 했으나 청나라 군세가 워낙 빨라 이조차도 실패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조선의 아픔 삼전도 치욕


싸우기는 커녕 피할 수 조차 없던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 입성하고 성문을 닫자마자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강화도의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강화도까지

완전히 점령한다. 


또한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군은 식량 부족과 추위에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되고 결국 화친파 최명길의 제의를 받아들여 19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고립된지 한달여만에 조선 국왕 인조와 왕세자는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책봉서를 바쳐 두 마음이 없음을 맹세하고 청태종에게 절하고 이마를 땅에 박으며 항복하였다. 처절한 패배였다.


또한 청나라는 60만명에 달하는 조선의 백성을 압송했으며 다음과 같은 조약을 맺게 된다.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행한다.


2. 조선은 이 시작으로부터 명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끊는다.


3. 기일 내에 왕세자와 제2자 및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낸다.


4. 청국이 명나라를 칠 때 원군을 보낸다.


5. 내외고관과 혼인을 맺고 친하게 지낸다.


6. 세폐로 황금 1백 냥, 백은 1천냥, 기타 20종의 토산품을 바친다.


7. 정삭 경조의 사신은 명나라의 예에 따라 지킨다.


이 조약에 따라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보내지며 조선의 치욕적인 양 호란은 이렇게 끝이 나게 된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청나라의 패권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실패한 외교에 대한 대가를 잘 보여주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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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이야기 잘읽었습니다.
    선양 북릉공원 여행후기 쓰다가 배경지식으로 살펴봤어요
    포스팅에 이블로그로 링크도 남겨놓겠습니다~
    http://qing.one/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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