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이 사람을 기억하자! 위대한 홍범도 장군
친일을 한 자손들은 떵떵거리며 살며 반민족행위를 통해 얻은 재산을 소송을 걸어서라도 환수해가는 마당에 독립운동가들과 그 자손들은 힘들게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
하물며 일제의 군대를 상대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던 한 위대한 장군은 저 이역만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그곳에서 조국의 독립 소식도 듣지 못한채 숨을 거둔다... 그가 바로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 그는 누구인가? - 성장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일주일만에 사망하여 동네 부인들의 젖동냥을 통해 성장한다. 그 아버지 역시 가난한 소작농이었기에 유년시절의 홍범도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많은 고생을 했다. 여기에 그 아버지마저도 홍범도 장군이 9살때 죽었기 때문에 머슴살이 등을 통해 성장해간다.
그가 15살이던 무렵, 두살을 올려 병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긴 하나 병영 군관들의 비리 등을 겪으면서 뜻이 맞지 않아 3년의 짧다면 짧은 군생활을 마치고 탈출한다. 이후 1890년부터 금강산의 신계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이때 구국의 영웅 이순신장군을 비롯하여 의병들의 활약상을 들으며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애국에 대한 생각을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 그는 누구인가? - 의병이 되다
1895년 신계사에서 파계한 홍범도 장군은 군대에 있을 때 배웠던 사격을 통해 사냥을 하면서 생활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학농민운동 탄압을 시작으로 명성황후 시해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탈해가는 일제에 대하여 반발하는 반일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철령 땅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이때 홍범도 장군과 함께한 의병은 총 14명으로 함께 사냥일을 하던 포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유인석의 의병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하지만 이 와중에 동료들이 전사하자 의병을 해체하고 다시 포수 생활을 한다.
이후 홀로 친일 관리와 일본군을 살상하는 등 단독 의병활동 등을 하다 1907년 일제의 강제 총기 수거령 등에 반발하여 다시 함경도 갑산 일대에서 궐기한다. 이때 당시 홍범도 장군의 산하에 600~700명까지 모였는데 가파른 산을 순식간에 넘나드는 유격전으로 일본 정규 부대와도 수십번의 전투를 벌인다. 이때 홍범도 장군의 별명은 '날으는 홍범도'로 1908년 연해주로 넘어가기까지 일본군 수십명을 살상하고 일본의 주재소, 관사 등을 습격 소각하는 등 성과를 거둔다.
|홍범도 그는 누구인가? - 연해주 활동과 봉오동전투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더 이상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할 수 없었던 홍범도 장군은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이동한다. 연해주에서 홍범도 장군은 유인석이 중심이되어 추진한 13도의군에 참여하였지만 2~3개월 후 벌어진 경술국치와 러시아군의 항일탄압으로 인해 13도의군이 해체되었고 이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조직이었던 권업회 활동을 하며 신문, 교육, 한인의 경제력 향상에 이바지 하는 한편 항일무장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항일무장투장의 길에 나서는데 9월 간도로 이동 후 국내 진공 계획까지 세운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3개 중대 약 300여 병력의 대한독립군을 세우고 국내 진공작전을 지속적으로 감행하는데 일제 역시 이를 막기 위해 접경지역에 군사력을 강화했으나 독립군은 지속적인 게릴라전과 삼둔자 전투 등 많은 성과를 거둔다.
이에 일제는 마침내 250여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 1920년 6월 봉오동으로 진군한다. 그러나 이미 이를 알 고 있었던 홍범도 장군은 월강추격대를 지속적으로 유인하여 봉오동 골짜기 안에서 격파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봉오동 전투다.
2019/07/24 - [국사/현대] - 일제를 상대로 한 우리 민족의 위대했던 승리 봉오동 전투의 모든 것!
독립신문에 의하면 이때 일본군은 157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다수 나왔으나 독립군은 4명 전사와 2명의 중상자만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제는 이 패전을 계기로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세우고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1명을 죽이는 훈춘사건을 조작한다.
이에 일제는 이를 트집잡아 중국 만주로 군사를 움직였고 이에 독립군은 일본군의 간도침입을 완벽히 격파하는 이른바 청산리대첩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 이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신민단, 국민회군 등이 이루어낸 빛나는 승리였고 봉오동전투의 승리가 불러온 또 다른 쾌거였다.
|홍범도 그는 누구인가? - 자유시참변과 비극
청산리대첩의 승리후 홍범도 장군은 일제의 재차 추격에 대비하여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러시아령 자유시로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한인 무장부대들이 대다수 자유시로 들어왔다. 그러나 집결한 군 부대의 통솔권 특히 독립군 내 공산당 파벌 싸움으로 인해 자유시 참변을 겪고 독립군의 세력은 급속히 위축되고 소련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군을 물리는대신 일본측이 요구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의 해산을 소련이 받아드리면서 독립군은 뿔뿔히 흩어지고 홍범도는 소련에 남아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후 연해주 지방에서 소련 공산당에 정식 입당도 하였지만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카자흐스탄 땅으로 강제 이주된다.
이후 고려인 극장에서 경비를 하며 말년에는 공장 노동자로 삶을 살아가다 독립이 되기전인 1943년 노환으로 별세한다. 위대한 영웅의 쓸쓸한 죽음인 것이다. 때문에 홍범도 장군의 묘지는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한 공동묘지에 있다.
이후 스탈린이 죽고 소수 민족 탄압이 멈춰지면서 홍범도를 주제로 한 연극은 물론 크즐로르다에 홍범도 거리도 있을 정도로 기억되고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 때에 이르러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오는 것을 추진했으나 평양출신으로 알려진 홍범도 장군에 대하여 북한이 반발하면서 무산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홍범도... 비록 지금은 이역만리의 땅에 묻혀 있으나 그의 독립에 대한 혁혁한 공과 열망은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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