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왕위는 내줬으나 편하게 살다간 폐세자 양녕대군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 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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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는 내줬으나 편하게 살다간 폐세자 양녕대군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위대한 왕 하면 떠오르는 세종대왕, 그는 태종의 3번째 아들로써 엄연히 그 위에는 장자였던 양녕대군, 그리고 둘째였던 효령대군이 존재 했다. 옛부터 장자가 왕위를 이어 받을 우선순위를 갖는데 비해 3째였던 충녕대군(세종대왕)이 조선 제 4대 왕위에 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드라마 조선구마사에서 나올 양녕대군 그는 과연 실제 어땠고 누구였을까?

 

|양녕대군의 어린시절


양녕대군은 어렸을적부터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 단순히 장자여서가 아니라 그 윗형 3명이 모두 어린시절 요절을 하였기 때문에 더 애지중지 키워왔던 아들이었다. 특히 조선의 건국과 두번의 왕자의 난을 거쳐서 왕위에 오른 태종에게 그 마음을 달래주는 아들이 바로 양녕대군이었던 것이다. 

 

양녕대군은 20살까지는 큰 문제 없이,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이미 10살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니 그 지위 또한 탄탄했다. 아무래도 태종이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경험을 토대로 양녕을 일찍부터 세자자리에 올려 그 권력을 강화시켜주려고 했을것이기 때문에 태종 다음은 단연 양녕대군으로 이를 부인할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녕대군의 여색 그리고 폐세자

 

양녕대군이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평소에도 시와 풍류를 너무도 좋아했던 양녕은 선공부정(벼슬 이름)이오방, 악공 구종수와 궐을 나가 여색을 탐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태종과 원경왕후는양녕의 기행에 대해 큰 근심을 한다. 

특히 양녕은 중추 곽선의 첩인 '어리'라는 여인과 간통을 하기 시작한다. 이에 태종은 극노하여 세자를 장인어른인 김한로의 집으로 쫒아보냈고 처음에는 그 죄를 뉘우치겠다며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내 겨우 궁으로 돌아온다. 이때, 그를 꼬신 죄로 이오방, 구종수를 참수하며 태종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그러나 얼마 못가 세자는 어리를 다시 불러 장인어른 김한로의 집에 숨겨 놓았다가 밀회 하여 아이까지 갖게하니 태종은 세자의 출궁을 금지하고 장인 김한로도 경기도 안성으로 보내버렸다. 여기에 양녕대군은 자신에게 내린 처사가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직접 상소해 왕에게 올렸고, 태종은 여기서 완벽하게 양녕대군을 폐세자 시키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물론 이뿐만이 아니라 양녕대군의 음탕함과 실책들이 꾸준히 있었기에 그렇게 양녕대군을 아꼈던 태종의 마음이 휙 돌아섰고, 더군다나 셋째 충녕대군의 능력과 그 모습이 대단한지라 태종은 양녕대군 폐세자의 카드를 빼들 수 있었다. 

 

|양녕대군의 폐세자 이후 행보

 

일각에서는 양녕대군이 자신보다 능력이 좋은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하고자 일부러 기행을 삼았다고 하지만 사실 증거는 없다. 

여색과 음탕함 그리고 태종에 대한 항명등으로 인해 폐세자 되어야 했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정설이다. 양녕대군은 폐셰자가 된 1418년부터도 계속 사고를 치고 다닌다. 이를 지켜본 태종(피의 이방원)이 참은 것만 봐도 그가 양녕대군을 사랑했는지를 오히려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양녕대군은 폐세자 이후에도 담을 넘고 남의 첩을 건들고 다니는 등 사고를 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세자 시키는 날 울며 안타까워 했다고 전한다. 

또한 양녕대군이 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노비부터 시작해서 그가 쓰던 물건들도 다 보내줬을뿐 아니라 그와 사고친 기생 어리까지 광주로 보내니 태종이 얼마나 양녕대군을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처음엔 강화도로 보냈다가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광주로 보낸 것도 태종의 마음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봤을 때, 양녕대군은 분명 자신의 행동과 실책으로 인해 폐세자 된 것이며, 그 성정이 동생 충녕대군과 비교해 한참 모자랐던 형일뿐이지 양보설은 맞지 않다고 본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양녕의 행보

 

세종 역시 자신의 형인 양녕대군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실제로 왕권에 위협이 된다거나 정통성에 시비가 있어 후환이 될 수 있음에도 세종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양녕대군이 사고를 쳐서 신하들이 탄핵을 올려도 세종은 이를 다 무시하거나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1년에 한번은 꼭 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또한 아예 한양에서 살게끔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경기도 광주에서 계속 살게끔 처리된 일도 있었다. 

 

|세종이 죽은 후, 양녕대군 세조를 응원하다!

 

세종이 죽은 후, 양녕대군은 이제와는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그가 아무리 폐세자에 처하고 여색을 탐하고 풍류를 좋아하며 놀기는 좋아했던 인물이었으나 궁의 일과 왕권에는 관심이 많았던 인물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이 죽고,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수양대군(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이때 양녕대군은 왕실의 큰 어른으로써 세조의 행위에 찬성을 한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세조의 적인 안평대군의 사사를 스스로 주청했고, 단종의 죽음에까지 관여하며 정치적 행보를 보낸다. 그의 위치가 왕실의 어른인지라 세조는 아주 좋은 명분 삼아 일을 해결 했을 것이다.

 

즉 자신들의 조카를 죽이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때문에 세조 역시 양녕대군이 죽는 그날 까지도 왕실의 어른으로써 모시며 모든 후사를 누리게 해줬다. 양녕대군은 그 말년에 환후를 고치기 위해 온천을 가도 세조는 항상 신하들을 보내 수행케 하고 양녕대군의 서자를 벼슬에서 승진시키는 등 최고의 대우를 다해줬다고 전한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동생 세종보다 12년을 오래 살았고 당시 꽤 장수를 누린 68세의 나이로 죽는다. 폐세자임에도 일생을 향락과 한량처럼 산 양녕대군은 말년에는 수양대군을 두둔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내며 죽는날까지 편하게 살다 죽는다. 그야말로 평생이 특이했고, 우리 역사속에서 찾기 힘든 왕자의 사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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