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시아버지에게 친정이 멸문 당한 세종대왕의 부인 소헌왕후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 30.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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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에게 친정이 멸문 당한 세종대왕의 부인 소헌왕후 누구인가?

조선의 성군이자 우리 민족의 위대한 왕 세종대왕, 완벽할 것만 같은 그도 잘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부인 소헌왕후에 대한 남편의 역할이었던 것 같다. 시아버지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을 잃은 비참함을 겪어야 했던 소헌왕후.. 그녀는 어떠한 삶을 살았던 인물일까? 

 

소헌왕후의 자녀들 

|소헌왕후 왕비가 되다

 

소헌왕후 심씨는 본관이 청송이며 개국공신 심덕부의 손녀이자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이다. 태조의 차녀 경선공주가 심덕부의 아들과 결혼했으니 소헌왕후 심씨(경선공주가 세종대왕의 베필로 추천했다는 설이 있음)는 시조카가 되며 그녀의 가문은 그야말로 힘 있는 가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1408년, 당시 양녕대군이 세자였으니 태종의 3남인 충녕대군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경숙옹주라 불렸다. 그러나 1417년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쫒겨나자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으면서 경숙옹주였던 소헌왕후는 경빈으로 봉해졌다 왕비가 되었던 것이다. 

 

대왕세종에서 소헌왕후 

 

|소헌왕후 가문의 비극 - 태종의 칼날이 심온을 겨누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에 소헌왕후 역시 왕비가 되었다. 일찍부터 자신의 딸과는 상관 없이 덕망이 높았던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영의정 자리에 심온이 올랐던 것은 태종 이방원의 명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태종 이방원의 일인지하 권력에 대한 욕망은 외척 세력을 가만두지 않았다. 자신의 부인도 그랬고, 형제들도 그랬다. 피를 통해 권력을 독점한 이방원에게 소헌왕후의 외척 역시 가만둘 수 없는 세력이었다.

 

태종은 심온을 영의정으로 만들어 놓고 소헌왕후의 외척세력을 뿌리뽑을 계획을 삼고 있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온은 명나라의 사은사로 떠난다. 심온이 떠나는 행렬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그를 환송했다. 역사에 따르면 심온을 환송하기 위해 한양의 온 거리가 비었다고 할 정도였다. 태종 이방원의 심기에 제대로 거슬렸던 순간이었다.

 

태종은 그때 눈에 띈 사람이 바로 강상인이었다. 강상인은 태종의 신임을 받아 병조참판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강상인은 군사에 관한 보고를 세종에게만 올렸는데 이것을 태종이 명분삼아 "상왕(태종)을 모욕하고 군사를 함부로 움직였다"고 죄목을 덮어씌웠다. 강상인, 박습 등을 포박해 고문하여 심온의 동생 심정의 연루사실을 자백 받아냈다. 이 모든 것이 심온이 명나라의 사은사로 있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소헌왕후 가문 풍비박산 나다

 

141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세종대왕의 즉위를 고하러 갔던 심온이 아무것도 모른채, 임무를 마치고 국경을 넘자마자 태종이 보낸 체포조에게 영문도 모르고 체포 당한다. 그리고 동시에 심온과 대질심문을 할 수 있는 박습, 심정 등을 모조리 참수한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심온은 얼마나 억울했던지, 아니라고 소명했지만 이미 자신을 죄인으로 지목했던 인물들이 참수 당했고 한양으로 와보지도 못하고 수원으로 끌려가 사약을 받고 죽는다. 뿐만 아니라 심온 형제들은 물론 자식들까지 귀양을 가고 심온의 부인 그러니까 소헌왕후의 어머니는 관노로 보내버렸으며, 소헌왕후의 형제들 역시 벼슬에 오를 수 없도록 하는 등 가문을 박살을 내버린다.

소헌왕후는 그 비참함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신하들의 소헌왕후의 폐위에 대한 상소가 빗발쳐 올라오며 또 다시 위기를 받는다. 그러나 태종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일까 이를 거부하며 소헌왕후의 폐위를 반대한다. 이미 세종대왕의 후사를 튼실히 해주었으며 소헌왕후의 심성을 잘 알기에 폐위는 막았던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소헌왕후

|소헌왕후는 달랐다 

 

자신의 가문에 비참한 아픔이 있었음에도 소헌왕후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내명부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꼽는 왕비였다. 그만큼 덕이 있던 왕비였다. 세종에게는 자식도 많았고 부인도 소헌왕후를 제외하고 다섯명이나 더 있었음에도 그 어떠한 분란도 기록되지 않는다. 세종도 자신의 아내 소헌왕후의 덕을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었을 정도였다. 

또한 세종대왕은 태종이 죽었음에도 처가였던 심씨 가문을 복권해주지는 않는 것에 충분히 소헌왕후 심씨의 마음이 안좋았을 수 있었겠지만, 그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소헌왕후의 생해 후반 불교에 힘썼는데, 1444년과 1445년에 그녀의 어머니도 죽고 아들인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어린나이에 죽으면서 더욱 불법에 힘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년 후, 소헌왕후는 1446년, 52세의 나이로 이질에 걸려 수양대군의 자택에서 눈을 감게 된다. 소헌왕후는 이후 세종과 함께 여주의 영릉에 합장되었다. 소헌왕후의 가문은 아들 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복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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