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태종 이방원의 넷째 아들, 일찍 죽었던 성녕대군은 누구인가?

윤여시 2021. 3. 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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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넷째 아들, 일찍 죽었던 성녕대군은 누구인가? 

태종 이방원은 비록 자신은 형제들을 죽이며 왕위에 올랐지만, 자신의 자식들만큼은 그러질 않길 바란 왕이다. 하지만 적장자였던 양녕이 폐세자 되고 효령을 지나 충녕(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 양위가 다사다난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는가? 충녕대군의 동생인 태종의 4남 성녕대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성녕대군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성녕대군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 낳은 7명의 아들 중 양녕대군의 위의 3명의 아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양녕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1405년 태어난 성녕대군은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에 이은 막내이다. 전주이씨 성녕대군파의 시조이기도 하다.


성녕왕후의 이름은 이종으로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유일하게 태어났다. 이미 태종과 원경왕후가 40세 무렵 낳은 아들로 귀하디 귀한 늦둥이었다. 사실 당시 조선왕이 평균 수명이 40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늦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만큼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녕대군은 총명함과 용모가 단정하여 더욱 많은 사랑을 받았다. 12세에 창녕 성씨 촤찬성이었던 성억의 딸과 결혼했으며, 1414년 대군에 봉해졌다. 

 

 

|학질(홍역)에 걸려 죽은 성녕대군

 

1418년 성녕대군은 학질이라 불리는 홍역에 걸리고 마는데, 이때 태종은 국사도 돌보지 않고 오직 성녕대군을 걱정하며 흥덕사에 가 기도를 올렸다. 또한 이때만 하더라도 병이 다스리는 것을 어의는 물론 무당도 관여 했는데, 태종은 성녕대군의 완두창 예후를 승정원에 명해 점을 쳐 알아보게 했다고 전해진다. 

 

점치는 맹인들은 모두 길하여 성녕대군이 나을 것이라 전했다. 이때, 충녕대군은 주역점을 해석하여 태종은 물론 모두가 감탄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성녕대군이 아픈 때에도 활쏘기를 즐겨 노한 태종에게 꾸중을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녕대군이 죽고 태종은 수라조차 들지 않았고 원경왕후와 슬픔에 빠진다. 이후에도 태종은 성녕대군을 말하며 그리워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태종이 성녕이 쇠고기와 닭고기를 좋아하는 것까지 기억해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태종은 성녕이 죽자 의원을 파직했고 당시만 해도 궁안에서 성녕의 치료를 위해 굿을 한 보문이라는 무녀를 내쫒고 관비로 보냈다가 성녕대군을 모시는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다. 이후 무당에 의존하는 의료 시스템을 태종은 믿지 않았고 의술에 관심을 둬 조선 초기 의학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한 성녕대군 묘


|성녕대군 사후 

성녕대군은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묻힌다. 이후 세종이 즉위하고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이 성녕대군의 양자로 들어와 입적한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에서 죽고 그 가문이 멸문 당했으며 성녕대군의 부인 성씨도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겨우 석방되는 등 그 대가 끊기기 시작한다. 1459년 성녕대군의 대가 끊기자 효령대군의 6남이었던 원천군을 양자로 들여 제를 지내게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성녕대군의 대는 일곱번이나 끊겼으며 고종이 이를 딱히 여겨 성녕대군의 후손을 찾아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전해진다.

 


최근 드라마 조선구마사에서 강녕대군의 모티브가 된 것이 바로 성녕대군일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아꼈던 원경왕후와의 4남 성녕대군.. 너무 일찍 죽었기에 역사속에는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어쩌면 그를 통해 피의 이방원이라 불리는 태종 이방원의 따뜻한(?) 측면도 볼 수 있다는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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