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조선의 기틀을 닦은 태종 이방원

윤여시 2013. 12. 2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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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기틀을  닦은 태종 이방원

 

영화 <관상>에서 보면 태종 이방원의 관상은 역모의 상이라 하여 그 형제를 때려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 표현 된다. 뭐 물론 일부분은 사실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종대왕이 마음껏 자신의 생각을 펼쳐 조선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도록 만든 왕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란 것이다.. 조선 왕중에 태종가 이름 이방원이 가장 많이 불리는 인물 .. 그에 대하여 알아보자

 

 

 

태종 이방원 가계

 

태종 이방원 가계도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의 5번째 아들이다

 

태종이방원은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5번째 아들로 사실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태종 이방원은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학문을 익히고 고려말 우왕 9년 1383년에 17세에 과거 문과에 급제한 수재중에 수재였다. 이후 5년후인 1388년에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면서 정권을 장악하자 슬슬 그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방원은 그의 아버지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아버지 이성계에게 고려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고 누차 결단을 촉구하는 한편 이성계의 적대 세력으로 변한 온건개혁파 정몽주를 죽이고 그 세력을 부수는데 앞장선다. 이후 1392년 이성계는 결국 왕위에 오르고 조선왕조는 세워졌으며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공로는 여러 아들 중에서도 단연 일등이었다.

 

 

 



 드라마 정도전 이방원

 

제1차 왕자의난

 

하지만 이방원의 심기를 건드린 사건은 여기서 발생한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단연 첫 번째 부인 신의황후 한씨의 첫 번째 아들 방우가 태자에 책봉 되어야 했으나 그는 애초부터 조선 건립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왔으므로 애초에 세자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결국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가장 큰 일등 공신이었던 이방원이 세자에 책봉 되어야 했으나 일찍부터 왕권보다는 신권이 더 강해야 한다는 신권중심 왕조를 주장하던 정도전과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힘을 합해 어린 동생 방석을 세자에 임명하게 만든다.

 

정도전은 왕권에 대한 야망이 있던 이방원보다는 자신의 생각인 신권의 생각을 주입하기 쉬운 방석을 왕으로 올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이방원을 비롯하여 첫째 부인이었던 신의황후의 여러 아들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곧이어 정도전이 방석을 제외한 다른 왕자들의 정치 참여와 사병을 빼앗으려 하자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정도전은 물론 강씨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남은 신효생등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이성계를 도운 개국공신들도 죽인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

 

제 2차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난의 성공으로 정권을 잡은 이방원은 자신이 세자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뜻밖에 자신의 둘째 형 이방과를 추천한다. 이것은 제1차왕자의 난에서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개국공신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까지 왕위 욕심을 냈다는 세상의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이방원의 한 수 더 내다 본 수였다. 특히 그가 세자로 추천한 이방과는 자신의 왕위는 잠시 자신의 동생 이방원이 맡겨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방원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한편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들이 서로 권력 때문에 죽이는 모습과 자신의 친구이자 신하였던 정도전 등이 죽는 모습을 보며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자신의 고향 함흥으로 떠나니 이가 바로 2번째 왕 정종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방원 자신의 바로 윗형인 넷째 이방간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간의 야심에 불을 지핀 사람이 나타났으니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음에도 인정 받지 못하고 이에 불만을 토로하다 귀양까지 떠났다 돌아온 박포였다. 박포는 방간을 만나 이방원이 방간을 먼저 기습 공격할 것이라며 선제 공격을 하자고 주장했고 이에 속은 이방간은 이방원에게 먼저 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방간의 공격을 막아내고 박포를 처형하고 그 형 이방간을 귀양 보내게 된다. 그 후 바로 이방원은 왕위를 물려 받으니 바로 태종이다.

 

 

 

 

이방원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배우 유동근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후 조선을 자신이 꿈꾸어 왔던 왕조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가장 중요한 왕권 강화를 위해 일체의 사병을 허락치 않고 모두 중앙군에 흡수시키는 작업을 했다. 또한 고려의 잔재들을 척결 하고 호패법, 서얼금고법은 물론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 강화에 앞장서기 시작하기도 했다.

 

태종은 또한 조선을 세우는데 힘을 쓴 공신들을 척결하는데 모든 힘을 다했는데 자신의 왕위 계승에 도움을 준 이거이는 물론 자신의 장인이자 외척 세력들도 가감 없이 척결하는데 앞장 섰다. 자신의 아들 세종을 위한 왕권 강화에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태종은 왕권이 강화되자 관리들의 벼슬을 체계를 정리하고 신문고를 세워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으며 민생 안전에 몰두해 조선의 전성기의 기틀을 닦았다.

 

이방원은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 계속 왕권강화와 조선의 기틀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고 자신의 세 번째 아들 세종에게 그 왕위를 물려주고 1418년 17년만에 스스로 왕위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방원은 스스로 태상왕이 되어 수강궁에 머물었으나 이때에도 조선 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며느리이자 세종의 부인인 소현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숙청하니 이 또한 조그마한 불씨라도 제거 하려는 이방원의 권력 욕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후 1422년 태상왕에 있던 내내 세종의 왕권을 강화시켜 주려 했던 이방원은 눈을 감고 마는데 그의 나이 56세였다.

 

물론 태종 이방원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1,2차의 왕자의 난과 형제를 죽이면서 까지 왕에 오른 잔혹한 인물로 볼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조선 왕조의 왕권 강화와 유교 문화에 대한 큰 기틀을 잡아 놓은 위대한 왕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세종 대왕 역시 이 같은 튼튼한 기반을 토대로 자신의 뜻을 펼치며 조선의 전성기를 이룩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절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태종 이방원. 그가 자신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보다 더욱 조선이란 나라에 이바지 했던 것은 분명 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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