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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완성된 역법!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 그는 과연 누구일까?

윤여시 2019. 11. 3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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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완성된 역법!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 그는 과연 누구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예로부터 하늘을 연구하는 천문학을 한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과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었다. 조선시대, 이 천문학이 꽃을 피웠던 적이 있다. 바로 세종대왕 때이다. 그리고 그 조선초 천문학의 기틀을 완성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순지라는 인물이었다. 이순지 그는 과연 누구일까?

 

|이순지 역법이 필요한 세종의 눈에 들다

 

이순지는 당시 중추원부사를 지낸 이맹상의 아들로 태어나 1427년 21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외교문서를 관리 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바로 이때,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역법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고 정확하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 중 재능있는 사람들에게 역법에 필수적인 계산법을 익히게 했는데 그 중 이순지가 가장 눈에 띄는 재능을 보여 세종에게 선발된다. 

사실 그 당시 천문학은 농업이 국가 경제의 기반이었던 조선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필수적인 학문으로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 주기와 질서를 알고 계산하여 만든 달력은 너무나 필수적인 기반이었다. 또한 봉건제 국가에서 왕이 하늘의 질서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의 강화를 보장해주는 것이었기에 세종대왕이 역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맥락이었다. 

 

드라마 대왕세종 이순지

이순지가 세종대왕에게 총애를 받게 된 계기는 바로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점을 밝혀낸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이 같은 이순지의 보고를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중국에서 들인 역서를 통해 북위 38도가 맞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며 1431년부터 이순지에게 아예 천문관측 및 역법에 관한 일을  맡기게 된다. 

또한 1434년에는 이천과 함께 갑인자라는 활자를 만들어 냈으며 정인지, 김담 등과 함께 토지를 측량하는 업무도 해내었다. 당시 토지측량이 가진 의미는 세금과 농업 생산량 증대에 필요한 것이었다.

 

이후 1436년 간의대에서 천문 관측 임무를 맡아 수행하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상을 치루었으나, 세종대왕은 이순지가 천문역법의 자리를 오래 비우지 않았으면 해서 그 아버지였던 이맹상에게 아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하니 이순지에 대한 세종대왕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이순지가 쓴 천문학 책 칠정산외편

|조선 천문학의 근간을 만든 <칠정산외편>, <칠정산내편>을 편찬하다

 

이후 1436년 간의대에서 천문 관측 임무를 맡아 수행하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상을 치루었으나, 세종대왕은 이순지가 천문역법의 자리를 오래 비우지 않았으면 해서 그 아버지였던 이맹상에게 아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하니 이순지에 대한 세종대왕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1444년 이순지는 김담과 함께 세종대왕의 당시 이슬람의 역법을 연구하고 해설 하여 편찬한 칠정산외편을 만들어낸다. 이는 한문으로 쓰인 이슬람 천문 역법서 중 가장 정확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칠정은 해와 달,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을 뜻하며 태양과 달의 운행, 일식과 월식, 각 행성들의 운행을 정확하게 담은 책이다. 

한 해를 365일로 하고 128년에 31일의 윤일을 두었으며, 1년이 165일 5시간 48분 45초로 중국의 수시력보다 더 정확하며 오늘날과 비교해봐도 1초만 짧을 정도로 정확했다. 아랍의 천문학 성과를 조선에 맞게 해석하면서 당시 우리나라는 하늘을 분석하고 계산하는 놀라운일을 해낸 것이다. 일본을 예를 들어도 조선통신사를 통해 수시력법을 배워 1682년 일본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 냈으니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겠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 말고도 많은 천문역법서를 편찬하였다. 계산방식과 천문 기상, 재난에 대한 대비도 다루고 있는 제가역상집, 천문유초, 교식추보법과 같은 서책을 저술하며 조선 천문학의 기틀을 만들었다. 

 

|세조까지 많은 총애를 했던 이순지 

 

이순지는 칠정산외편 말고도 많은 천문역법서를 편찬하였다. 계산방식과 천문 기상, 재난에 대한 대비도 다루고 있는 제가역상집, 천문유초, 교식추보법과 같은 서책을 저술하며 조선 천문학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순지는 세조, 문종, 단종, 세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왕을 모시며 예조참의, 호조참판, 한성부윤, 개성부유수, 판중추원사까지 차근차근 올라가며 관직생활을 평탄하게 했다. 세종에 이어 세조도 음양과 지리는 모두 이순지와 의논하겠다고 할 정도로 총애가 대단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지는 성품이 정교하고 산학, 음양, 천문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평했으며, 그 아들 성종은 세종대에는 이순지와 김담 같은 사람이 천문학을 다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만한 사람이 없어 이순지와 김담 같은 사람을 골라 천문을 익히게 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또한 이순지는 과묵하면서도 공손해서 모든 일에 절제가 있었던 사람으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발휘한 인물로 조선조에는 평가하고 있을 것을 봐서 이순지는 벼슬은 하고 있었지만, 조선의 하늘과 땅에 관심을 두었던 천생 학자 스타일이자 위대한 천문학자라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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