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행주대첩 명장 권율
엄청난 흥행을 이끌고 있는 명량에서 짤막하게 나오는 권율 장군. 권율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라 불리는 행주대첩의 승리를 이끌어낸 장군으로 이순신, 원균 등과도 그 관련이 높은 장수이다. 권율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권율 권율 장군 그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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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장군의 출생
권율은 당시 이름 있는 명문 가문인 안동 권씨 집안의 막내아들로, 그 아버지 권철은 영의정에 까지 올랐으니 당대 최고의 유망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권율은 그 이름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일찍부터 관직에 오르지 않으려고 해서 주위의 의문을 샀는데 그의 아버지 권철이 죽고 깨달은 것이 많아 46세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오르니 그야말로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행주산성에 위치한 권율 장군 동상 |
| 임진왜란과 권율 장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권율은 류성룡과 윤두수의 추천을 받고 51세의 나이로 의주 목사의 관직에 올랐으나 유언비어 등이 돌며 이내 파직 당했다. 그러나 1년뒤인 195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능력을 인정 받아 다시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광주목사로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군대에 들어간 권율은 신중하게 전투하자는 지공을 건의 했지만 이광과 곽영은 이를 무시하고 급한 공격을 서두르며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왜군을 만나 대패를 하고 만다.
그 뒤 다시 남원으로 내려와 천명의 의용군을 모집한 권율 장군은 동북현감 황진과 함께 호남의 곡창지대를 노리며 내려오는 왜군을 이치에서 맞아 대승 하면서 우리나라의 호남을 지키는 공을 세운다. 이 승리로 권율은 전라감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권율 장군의 명전투가 벌어진 세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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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왕산성 전투와 세마대 유래
의주로 피난간 선조가 명나라에 원군을 청했고 명의 원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권율은
도성 탈환을 목적으로 2300여명의 관군과 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북진한다.
한양을 향해 북진하던 권율은 지금의 수원 화성과 경기도 오산의 근처에 위치한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세마) 독왕산성에 게릴라전과 지구전을 하기위해 군대를 주둔시킨다.
독왕산성은 산에 위치한지라 물이 귀한 곳이었는데 이를 알아챈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왜군은 성을 한달간 포위하게 된다. 그러자 권율은 산성위에 군마들을 세워 놓고 병사들에게 지시하여 말에게 쌀을 쏟아붓고 씻는 시늉을 하게 지시 했는데 멀리 포위하고 있는 왜군들이 볼 때는 물을 사용하여 말을 씻기는 것 처럼 보이게 되었고 성에 아직도 물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포위를 풀고 서울로 후퇴하게 된다.
그러자 곧바로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왜군의 뒤를쳐 승리를 따내니 일본군은 30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만다. 이 전투 이후로 지금까지 권율 장군이 말을 씻긴 곳이다 하여 세마대 지명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행주대첩 전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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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대첩
그러자 곧바로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왜군의 뒤를쳐 승리를 따내니 일본군은 30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만다. 이 전투 이후로 지금까지 권율 장군이 말을 씻긴 곳이다 하여 세마대 지명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독왕산성의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권율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지를 택하게 되었고 무너진 행주산성을 수리하고 목책을 세워 주둔지를 구축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합세할 줄 알았던 명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함에 따라 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기세를 몰아 한양을 다시 한 번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왜군 3만이 행주산성을 공격하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고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을 이용하여 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지만 왜군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인해전술로 성벽을 타오르기 시작한다. 치열한 공성전 끝에 백성들까지 관군을 도와 돌을 나르고 전투에 참여하면서 점차 승리의 기운이 조선을 향하게 된다.
행주대첩은 곧 권율 장군의 지휘와 전술, 조선의 화포, 백성들의 힘이 한데 모여 승리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권율 장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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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후의 권율 장군
권율은 행주대첩의 승리 이후 재침을 우려하여 파주로 움직여 도원수 김명원 등과 함께 주둔하게 된다. 이후 도원수 김명원을 대신해서 도원수가 된 권율은 도망병을 즉결 처벌한 죄로 해직되었다가 다시 도원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며 전쟁이 장기화 되자 권율은 적군의 북상을 다시 막기 위해 명의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적을 격파한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갑자기 퇴각령을 내리고 명나라가 협조를 안하면서 왜군에 대한 지대한 타격을 주는데는 실패한다.
왜란이 끝나고 권율은 사퇴하여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향년 63세의 나이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도원수때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전쟁에 세운 공들은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속의 권율 장군 명량에서는 짤막하게 등장하고 이순신 장군을 돕지 않는 인물로 나와 오해를 많이 할 수 도 있지만 권율 장군은 당시 나이로써는 상당히 많은 나이임에도 많은 육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며 임진왜란의 명장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또한 임진왜란 3대대첩인 행주대첩의 승리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짜릿한 승리였고 우리 역사속에 잘 남는 위대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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