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속 한심한 왕 선조 누구?
임진왜란 하면 나라를 구한 이순신.. 그리고 그와 항상 비교되는 나라의 주인이라 자부했던 조선의 한심한 왕... 선조 그는 과연 누구이길래 항상 나라를 져버린 왕으로 불리는 것일까? 선조에 대하여 한 번 알아보자.
선조를 알기 전 선조의 가계도를 살펴라 |
|선조를 알려면 그의 가계도를 살펴라
선조 그의 성격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그의 가계도는 아주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 조선은 건국이래 13대 왕 명종까지 모두 왕과 왕후에서 태어난 적통 출신이었다. 비록 성종이 세조와 정희왕후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기는 했으나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며 이 역시 적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달랐다.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가 낳은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사실 왕권과는 거리가 먼 방계승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종이 후사 없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 명종은 자신이 좋아했던 이복동생인 덕흥대원군의 아들 중 셋 째 아들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니 이가 바로 조선 제 14대 왕 선조다.
즉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왕권과는 전혀 상관 없는 왕족이 왕위에 올랐으니 선조 스스로도 당당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방계승통이란 컴플렉스를 안고 갈 수 밖에 없었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선조 역을 맡은 최철호 |
|선조의 집권 (임진왜란 전)
16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집권초기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이듬해 선조의 친정 능력을 인정하여 선조에게 편전을 맡긴다. 선조는 집권초기 성리학을 사랑하는 왕으로 학문에 정진하며 경연에서 정치를 토론하는 왕이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대학자들인 이황과 이이를 극진히 섬기고 훈척세력을 몰아 내며 선조는 조선에 새로운 정치 바람을 불러 오는 듯 했다. 그러나 훈척이 물러나고 깨끗하고 젊은 정치를 할 것 만 같았던 사림들이 당을 나누어 대립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분당은 동인과 서인이었는데 동인은 조식과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여립의 난이 불러온 기축옥사는 선조의 방계 콤플렉스를 자극 했고 무자비한 조사와 고문 처형으로 천여명이 넘는 대신과 선비들이 선조의 명령으로 죽었으며 특히 동인 세력 역시 이 사건을 통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또한 이 와중에 선조는 반드시 적자를 세자로 삼아 자신의 방계승통 컴플렉스를 지우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으나 불행하게도 왕후 의인왕후 박씨는 아이를 계속 낳지 못했다. 그러자 몇몇 신하들은 후궁이 낳은 자식이라도 세자에 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때 좌의정이자 서인의 대표인물이었던 정철이 첫번째 후궁에서 낳은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선조에게 고했다가 동인의 대표인물이자 우의정이었던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선조의 진노를 사 정철뿐 아니라 서인 자체가 실각을 한다.
그리고 끊임 없는 붕당 정치와 후사문제 속에서 선조는 이렇다 할 정치를 펴지 못하고 조선 최대의 위기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임진왜란의 성웅 이순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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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집권 (임진왜란 중)
붕당간의 권력 쟁탈이 치열하게 전개되도 선조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급급해 있었다. 그리고 선조 2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를 받은 왜군이 파죽지세로 부산포에 상륙하여 북진해오자 선조를 중심으로 한 조정은 보름만에 한양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도 마땅치 않자 평양으로 그리고 더이상 물러날데 없는 의주까지 피난을 간다. 이때 오갈데 없는 백성들은 왜군의 군화발에 처참하게 짓 밟히며 비참한 생활을 했다는데서 당시 조정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알 수 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간 이후 무수한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이순신 장군과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등의 활약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또한 선조는 명나라에 빌다시피 하여 구원병을 파견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임진왜란의 승기가 점점 조선쪽을 향해 기운다.
그러나 선조는 전쟁이 휴전 상태에 접어드는 등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특유의 의심과 급격히 부상하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를 드러내기 시작 했으며 전쟁 중 급하게 세자에 임명하긴 했지만 전국을 돌며 전쟁 수습 중인 광해군에게도 질투를 보이며 조금만 심사가 뒤틀려도 왕위에 내려오겠다며 분란을 일으켜 조정을 혼란스럽게 한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선조의 아들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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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집권 (임진왜란 후)
전쟁 간에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한 선조였지만 광해군이 전란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공을 세우자 광해군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해서 전위 소동을 9번이나 하며 많은 분란을 일으킨 선조였다.
7년간 국토를 황폐화하고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왕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51살 되던 해 김제남의 19살짜리 딸을 새로운 왕비로 받아드리니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다. 이후 선조는 인목왕후와 국혼을 맺은지 4년 후에 인목왕후가 왕자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적통 왕자를 얻게 된다.
그러자 전쟁 중 갖은 고생을 다하며 전란 수습에 힘을 쏟았던 광해군의 세자 자리는 한순간에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선조의 건강이 갑작스럽게 나빠지기 시작했고 선조는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34살의 장성한 세자 광해군을 내치고 2살의 아이에게 왕위를 넘길 수 없었으므로 광해군의 세자자리를 빼앗지 못하고 죽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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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탓에 세자자리를 빼앗길 것 같은 광해군의 독살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여튼 선조는 분명 재위기간 내내 방계승통의 한계에 자신을 가둬두었다.
그는 왕권지키기와 자존심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기축옥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건들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임진왜란 중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도망간 자신이 창피 했는지 이순신과 의병장들의 흠집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점점 심해지는 붕당정치를 막는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며 그 어느 왕들보다 인재가 많았던 신하들을 한데 모으는 리더십 조차 발휘하지 못했다. 덕분에 선조는 두 번의 난을 거치며 비참한 생활을 했던 왕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평가에서는 한심한 왕으로 평가 받는 불쌍한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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