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동양

황비홍의 배경 의화단의 난

윤여시 2015. 1. 2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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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홍의 배경 의화단의 난


''중국'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나라.. 옛부터 중국은 그 장대한 역사와 함께 자신들이 최고라는 중화사상을 토대로한 높은 콧대를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중국 역시 19세기 말,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서구 열강들의 등장에 굴욕에 굴욕을 거듭하면서 밖으로는 유럽과 일본에게 위험에 처하고 안으로는 곳곳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특히 황비홍의 배경이 되는 의화단의 난 역시 중국역사에 있어서는 또 다른 치욕의 역사를 불러오게 된다고 하는데... 의화단의 난 무슨일일까?



 

의화단


의화단의 모습



|의화단은 어느 집단인가?


의화단은 산동지방에서 원나라 때부터 맥을 이어오던 백련교 계통의 비밀결사 단체로 대도회, 팔괘교, 의화문, 이괘교, 여의교, 산동 노단 등 아주 세밀하면서도 비밀스러운 결사단체였다. 그들은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병이라 칭하며 권법, 봉술을 익히고 주문을 외우면 총탄도 피할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그들을 믿는 백성들도 꽤 많았다. 


특히 그들은 단순한 종교나 무술에 그치지 않고 몰락해가는 청나라를 무너트리고 중국에 간섭하는 양인들을 몰아내자는 '부청멸양'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고 점점 서양 열강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청나라 조정이 흔들리면서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의화단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약한 취약 계층이었지만 정의롭고 일반 백성들은 괴롭히지 않아 산동 백성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한창때에는 베이징을 넘볼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했다.




 

1899년 일어난 의화단의 난...


|발생 배경


청나라 말, 마치 세계를 다 가진 것처럼 자존심을 세우던 중국 대륙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아편전쟁을 승리로 가져간 영국부터 프랑스, 미국, 독일에 이르기까지 서구 열강들의 중국 대륙 침략의 준비를 끝마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 열강들은 무엇보다 선교사를 앞세운 기독교 포교에 앞장섰는데, 이미 천진조약을 통해 청나라 내부는 기독교 포교를 인정한 상태였던지라 기독교에 대한 전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민중들은 기독교를 사교로 보는 경향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조상에 대한 제사 금지와 남녀칠세부동석과는 다르게 남자와 여자가 한자리에서 예배의식을 치루는 것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 민중들이 느끼기에 교회가 서양문화를 파급시키고 서양의 면화와 문물을 급속도로 들여오는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로인해 민중들의 기독교에 대한 분노는 점차 쌓여만 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배상금 지불 문제로 인해 백성들에게까지 세금을 걷기 시작하자 이 모든 것이 기독교를 앞세운 제국주의 때문이라고 불만을 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이 같은 불만들은 중국의 산동성에서 심하게 나타났는데 독일이 삼국간섭 이후 중국의 산둥성 지방에 철도를 깔기 위해 토지구입을 헐값에 하기 시작했고 해당 토지에 있는 중국인들의 민가와 묘가 훼손되자 그 불만은 극에 달았다. 또한 이 당시 극심한 자연재해 역시 안그래도 가난하고 배고픈 중국인들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배경속에 의화단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의화단


의화단은 서양, 중국 정부군과 싸워야 했다.

우리 동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전개


의화단은 청일 전쟁 이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반기독교 운동을 이끌며 외국 선교사들을 살해하는데 앞장서기 시작한다. 특히 1898년 10월 의화단에서 창과 권술을 가르치던 주홍등이 교회가 있는 평원현을 습격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교도들에게 해를 끼치는 평원교안을 일으켰고 서구 열강들은 이 같은 사태에 불만을 표하고 의화단을 탄압하던 위안스카이(원세개)를 산동의 담당자로 정해달라고 청나라 조정에 요구한다.


이러한 열강들의 부탁에 청 조정에서는 원세개를 산둥성 순무를 삼고 의화단을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이 일을 계기로 의화단은 오히려 급속도로 들고 일어난다. 1900년 봄 원세개의 탄압을 피해 도망친 의화단의 주력은 직례에 들어가 이 지역의 의화단과 합류하여 무서운 기세로 세를 확장하고 보이는 교회를 불태우고 근대식 철도와 열강들의 대사관들을 닥치는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의화단들의 폭동에 위협을 느낀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은 의화단이 계속 활동 할 경우 군대를 파견해서 진압할 수밖에 없다는 성명을 발표 하였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를 휘어잡고 있던 서태후와 그 측근들은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막기보다는 이들을 이용해 서양 열강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는데 이 같은 이유로 1900년 6월, 의화단은 북경에 무혈입성하여 외국 세력뿐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들을 탄압했던 관료와 군인들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서게 된다. 청나라 조정에서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의화단 폭거와 발맞춰 배외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열강에 의존하던 인물을 조정에서 내쫒기 시작했고 이러한 조정의 반응에 자신감을 얻은 의화단은 그때부터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를 시작했다. 





의화단이 들고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임오군란 같은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의화단의 테러로 인해 일본 공사, 독일공사가 피살 되었는데 의화단의 화살은 단순히 외국 관료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에 머물고 있던 서양인 전체를 향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양인과 양녀, 아이를 죽이는데 현상금을 거는 등의 잔혹함을 보이며 이성을 잃어간다. 한편 의화단에 의해 자국의 국민을 잃는 피해를 입은 서양 열강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6개 군대는 영국 극동 함대 사령관 에드워드를 총지휘관으로 삼아 1900년 6월 10일 북경을 향해 진군한다. 하지만 이때만하더라도 20만에 가까운 의화단의 군세로 인해 곧바로 전투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긴장감 도는 대치속에 중국인들의 무자비한 테러가 계속 되자 연합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대를 움직여 북경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이를 지켜본 서태후는 강화냐 전쟁이냐를 고민하다가 의화단의 위세를 믿고 정부군과 합쳐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때 독일과 오스트리아 역시 연합군에 합류하면서 연합군에 참가한 나라는 총 8개국가가 되었고 이중에서도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한 나라인 일본이 주력을 이루어 전쟁 준비를 끝마친다.


6월 21일 마침내 선전포고가 내려지고 의화단과 서태후가 이끄는 중국 조정 그리고 서양 8개연합군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통솔에 대한 실력 부재와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의화단은 수큰 군세에 걸맞지 않게 오합지졸로 무너지며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자살한다. 이렇게 의화단을 손쉽게 쳐부순 연합군은 기세를 올려 북경으로 입성하였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서태후와 광서제는 자금성을 탈출하여 서안으로 도망쳤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도층의 도망으로 인해 북경은 그야말로 무법지대가 되어 연합군의 약탈과 폭행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도시 전체가 시체로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




 

베이징을 점령한 8개 연합군


|결말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의화단이 무너지자 전쟁에 참여한 8개국은 강화를 통해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고자 의견대립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연합국 대표들은 의견 조정을 위해 청나라에게 의화단 사건에 관여된 책임자 처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데 뜻을 모으고 청나라 조정에 책임자를 강력하게 처벌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책임자들에게 강등, 해임, 유배 등에 처할것을 요청했지만 연합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강한 처벌을 요구했고 결국 장친왕 재훈 자결, 단군왕 재의는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관련 왕족과 신하들이 줄줄이 처벌을 받게 된다. 이후 1901년 9월 7일 청나라 대표 이홍장과 연합국 대표 사이에 의화단의 난에 대한 신축조약 12개조가 체결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배상금 총액 4억 5천만녕 연당 금리 4푼 포함하여 9억 8천만냥을 지불할 것

2. 대고- 북경 사이의 포대를 철거

3. 북경- 산해관 사이의 요지에 외국 군대를 주둔

4.천진 주위 20리 이내에서의 중국 군대 주둔금지

5. 북경에 공사권 구역 설정

6.공사권지역에서의 외국 군대의 주둔


이 같은 조약 체결로 인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에 빠졌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겨우 목숨을 연명해오던 청나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게 되었다. 또한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함에 따라 중국 역시 여러 열강에 뜯기는 비참한 최후에 맞닿뜨리게 된다.


우리나라의 동학과도 비슷한 것 같지만 씁쓸한 것은 조선 조정은 자국의 군대와 외국 군대와 연합하여 백성인 동학교도들을 탄압했다는 점이었고 물론 속셈이 있긴 했지만 청군은 의화단과 함께 외국 군대와 맞서 싸웠다는 점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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