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동양

위대한 모험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윤여시 2015. 3. 2.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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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모험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중국사에서 위대한 제국을 만들어냈던 칭기즈칸과 그의 아들들로 이어지는 원나라 왕조는 동양과 서양의 교류에 있어서 크나큰 전환점이었으며 서로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시대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지칠줄 모르는 모험과 여행으로 당시 원나라를 아주 상세히 기록한 <동방견문록>으로 후에 콜럼버스의 위대한 탐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마르코폴로도 이 시대 사람이었다.


 


위대한 여행가 마르코폴로



|출생배경과 원나라를 향한 첫 여행 


마르코폴로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집안은 베네치아에 터를 잡은 무역상이었다. 마르코폴로의 아버지는 보석상으로 장사를 하기 위하여 중국을 찾았고 이때 마르코폴로의 아버지는 쿠빌라이로부터 뜻하지 않은 주문을 받게 되어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다. 쿠빌라이의 주문은 학문에 통달한 기독교도 100여명과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교회에 타오르고 있는 성유를 찾아오는 것이었는데 성유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기독교도 100명을 구하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소개로 기독교도를 만나 동행했지만 그들은 중간에 도망을 쳐버리고 고민하던중 이때 마르코폴로가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쿠빌라이가 있는 원나라로 향하게 된다. 그가 원나라 수도에 도착했을때는 4년이 훌쩍 지난 21세였다. 똑똑하고 총명했던 마르코폴로는 쿠빌라이에게 선택되어 측근으로 중용됐으며 이후 17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며 쿠빌라이의 외교 사신으로 여러 차례 외국에 파견되기도 한다.





마르코폴로 여행기

 


|원나라에서의 여행


칭기즈칸이 만들어 놓은 대제국은 그의 여러 아들들에 의해 갈라졌다.  때문에 사실 형제들간에 우애는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원나라의 쿠빌라이칸과 그 동생 일 한국의 훌라구는 예외로 그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훌라구에게는 아르군칸이라는 손자가 있었는데 그가 쿠빌라이칸에게 후처를 구한다고 요청했다. 이에 쿠빌라이는 17세의 황녀 코카친을 선발하여 마르코폴로가 그녀를 수행토록해 일한국(지금의 이란)으로 보내게 된다. 


하지만 마르코폴로의 행렬이 이란에 도착하여였을 때는 아르군칸은 이미 죽어버려서 그 대신 그의 아들 가잔칸과 코카친을 결혼시키고 마르코폴로는 다시 원나라 수도를 향한 귀한길에 오르게 된다. 마르코폴로는 본래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에서 배를 타려고 했지만 배가 너무 낡아 육로를 택해 원나라로 향하게 되는데 이 귀환길이 자동적으로 마르코폴로에게는 여행로가 되었다. 


마르코폴로는 지금의 중앙아시아의 바르푸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현재 신장성의 카슈가르, 야르칸트를 거쳐 한달만에 돈황에 도착하였는데 이 길은 지난 한나라의 장건이 개척한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코스였다.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을 쓰다

마르코폴로가 17년 동안 원나라에서 경험한 생활과 여정은 그가 유럽으로 돌아와 쓴 <동방견문록>으로 남겨지게 된다. 마르코폴로는 당시 원나라와 동방의 문화, 뛰어난 기술, 건물 등 자신이 듣고 본 모든 것을 바탕으로 책을 기술한다. 하지만 <동방견문록>이 처음 유럽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였을 때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 유럽 사람들은 그의 책을 전혀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비꼬았다.

심지어 사람들은 마르코폴로에게 "거짓말을 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니 <동방견문록이> 거짓이라고 지금이라도 밝히는 것이 좋다" 라고 말하자 마르코폴로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오히려 <동방견문록>에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의 반 정도도 소개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니 당시에 반감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동방견문록>은 콜럼버스에까지 영향을 주어 동방에 흥미를 느끼고 떠난 콜럼버스의 위대한 탐험의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인들에게 동양에 대한 막연하지만 그 실체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마르코폴로 드라마>


|동방견문록은 거짓?


동방견문록이 분명 유럽에 미친 영향은 분명하지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지금도 많은 논란이 있다.

첫 번째는 마르코폴로가 직접 쓴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코폴로가 베네치아로 돌아온 뒤 이탈리아의 양대 무역거점이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무역로를 놓고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포로가 된 마르코폴로가 제노바 감옥에 갇혀 있던 중 함께 감옥에 있던 작가 루스티첼로에게 자신의 원나라 여행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리고 이때 1년 동안 마르코폴로의 말을 받아 적은 루스티첼로가 동방견문록을 냈다는 것이다.

사실 마르코폴로는 상인의 아들이었고 똑똑하긴 했지만 책을 쓸만큼의 교양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루스티챌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였기 때문에 이 둘의 조합은 예상외로 <동방견문록>을 뛰어나지만 약간의 과장과 허구가 있는 책으로 만들었다. 특히 동방견문록 자체가 말하기 좋아하는 유럽인들에게 끊임 없이 첨부와 삭제가 되면서 상상과 과장이 덧붙여졌고 허황된 기록이라든지 당시 다른 기록과 비교해서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뿐더러 여행 일정 역시 맞지 않는 기록들도 있기 때문에 정설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두 번째는 마르코폴로가 아예 중국 근처는 가보지 않았다는 설이다. 그 증거로는 위에서 말한것 처럼 마르코폴로가 관리로 일했다고 하는 기록이 어떤 원나라의 사료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며 더군다나 쿠빌라이칸의 총애를 받았다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마르코폴로가 결혼을 하러 떠나는 코카친의 호송길에 함께 했다는 내용 역시 원나라의 기록에는 행렬에 대한 기록만 남아 있을뿐 마르코폴로의 이야기는 존재 하지 않는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풍습이나 만리장성 인쇄술에 대한 언급이 없고 여러 일정들과 기록이 맞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 같은 이유로 지금의 학자들은 동방견문록이 마르코폴로가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작성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중국 사료와 동방견문록에만 쓰여 있는 사료들이 상당수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여러 도시 생활에서 그가 보고 들었던 기록 등은 마르코폴로가 직접 원나라를 방문했다는 주장 역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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