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의 창시자 노벨 그는 누구인가?
매해마다 노벨상의 발표가 있는 날이면 세계 여러 나라들은 귀추를 주목한다. 그리고 노벨상 수여자가 한명이라도 그 나라에 나오면 자랑스러워하고 또 노벨상 수여를 통해 그나라를 평가할 정도로 아마 상중에 제일 권위 있는 상이리라. 이 노벨상의 창시자(?)라 불린 사람 노벨 그는 과연 누구일까?
<알프레드 노벨>
|알프레드 노벨 어린시절
알프레드 노벨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쪽에 위차한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1833년 태어났다.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노벨은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 커야 했는데 알프레드 노벨이 네살 되던 1837년 아버지 이마누엘 노벨은 발명을 위해 러시아로 떠난 상태였다.
아버지 이마누엘 노벨은 유명한 건축가였지만 발명에 많은 관심을 두었는데 자신이 먼저 러시아로 떠난 후 스웨덴에 있던 남은 가족을 불렀고 노벨과 가족들은 이때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다. 러시아로 이주한 뒤 아버지 이마누엘 노벨의 공장은 나날이 번창하였고 때문에 알프레드 노벨 역시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이후 그가 18살 때 과학자가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알프레드 노벨은 다양한 경험을 하며 기계 공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외국 생활을 마치고 러시아의 가족품으로 돌아간 알프레드 노벨은 아버지가 발명해낸 기뢰(바다 지뢰)의 위력을 실감하며 점차 무기 발명쪽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크림전쟁>
|크림전쟁 일어나다
아버지 이마누엘 노벨의 사업도 번창하고 기뢰도 만들어내면서 승승장구 하던 1953년 크림전쟁이 터진다. 크림전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국내 카톨릭 교도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이슬람 나라 터키(투르크)의 술탄에게 팔레스타인 성지 관리권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촉발 되었는데 전통적인 그리스 정교 국가인 러시아의 주장대로 해결 되어야 하며 터키 영내의 그리스 정교도 1,200만명의 보호를 요구했다. 그러나 터키(투르크)가 이를 거절하였고 러시아는 7월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이 곳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무역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길목이었던 크림반도는 여러나라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지역이었고 터키는 마침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전쟁이 나게되자 이마누엘 노벨 공장은 군수품을 납품하느라 정신 없이 바빴고 특별히 러시아 정부는 이마누엘 노벨로 하여금 군함에 장치할 기뢰를 주문하는 등 본의 아니게 전쟁을 돕는 공장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마누엘 노벨은 러시아 정부의 이러한 조건을 받아드리는 대신 전쟁이 끝나도 계속해서 무기를 주문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전쟁 군수물자 제공에 동참한 것인데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크림전쟁에서 패하면서 1856년 파리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패배하고 말았는데 이때 이마누엘 노벨의 공장도 빚더미에 앉은채 무너지고 만다.
1859년 이마누엘 노벨은 스웨덴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아내와 막내 에밀과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갔지만 알프레도 노벨과 세 형제는 다시 재기를 꿈끄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았다.
<노벨의 다이나마이트>
|노벨 새로운 화약을 만들다
세형제는 우선 이제는 주인이 바뀐 노벨 공장에서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형 루드비히는 경영 능력을 인정 받기 시작하였고 알프레드 노벨은 건축 설계, 화약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때 알프레드 노벨은 핀란드의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핀란드 헬싱키로 이사 하였고 루드비히는 조그마한 무기 제조 공장을 세우며 재기를 마련했다.
알프레드 노벨 역시 과거 크림전쟁이 한창일 무렵 알프레드 노벨은 아버지를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시닌 교수를 찾아가 보았던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화학물질을 기억하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는데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력이 지금까지의 흑색 화약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니트로글리세린은 폭발을 일으키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까다롭고 불편했는데 이때 알프레드 노벨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바로 흑색 화약으로 채운 유리관을 니트로글리세린을 담은 구리관 속에 넣고 심지를 박은다음 한쪽 끝을 봉했다. 그리고 이 심지에 불을 붙였을 때 심지가 타 들어가면서 흑색 화약에 옮겨 붙고 이에 니트로 글리세린이 열을 받아 폭발하게 만드는 생각이었다.
1862년 6월 알프레드 노벨은 마침 핀란드에 놀러와있던 두 형에게 연구해왔던 폭탄을 보여주었고 핀란드의 한 호수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인채 힘껏 던져 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1867년 스웨덴 정부에 특허 신청을 한 알프레드는 유럽 전역의 특허를 받게 되었고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다이너마이트 세상에 나오다
알프레드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이 세상에 나오자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한다. 이후 1863년도부터 노벨의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은 산업현장에 쓰이기 시작하는데 스톡홀름공장은 이렇게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알프레드 노벨은 볼일을 보러갔다가 멀리서 들리는 폭발음을 듣게 되고 공장으로 급히 달려갔는데 공장은 이미 폭발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 공장 안에 있던 막내동생 에밀이 폭발 사고에 죽고 말았다.
동생의 희생에 상심이 컸지만 알프레드 노벨은 포기하지 않고 화약사업을 계속하게 되고 스웨덴의 유명한 사업가인 슈미트가 알프레드 노벨을 찾아와 동업을 제의하면서 니트로글리세린 주식회사를 세우고 공장을 세우며 유럽 최고의 부호로 발 돋음해간다. 그는 유럽 전역에 공장을 세워가며 알프레드 노벨 회사를 설립하였고 독일에 대규모의 공장을 조성하는 등 그의 사업은 유럽전역을 향해 그리고 미국과 세계전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니트로글리세린으로 인한 폭발 사고가 일어났고 세계 전역에서 니트로글리세린을 위험물질로 간주하여 만드는 것은 물론 수송 등을 금지시켰다. 여기에 엎친데 겹친격으로 특허권을 둘러싸고 말썽이 일어났는데 물론 알프레드 노벨의 승리이긴 했지만 단순히 니트로글리세린으로는 더 이상 사업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알프레드는 이에 니트로글리세린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고 액체 상태인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후 알프레드는 흡수력이 좋은 규조토에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시켜 고체로 만드는 실험에 성공했고 이는 안정성을 완벽히 보완하며 다시 여러 나라들의 허가를 다낸다.
이후 알프레드 노벨은 이 화약에 '힘'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따온 말인 '다이너마이트'라 이름을 붙이며 세상에 다이너마이트를 알렸고 1867년 스웨덴 정부의 특허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다시 한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노벨, 노벨상을 만들다.
이후 알프레드 노벨은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세계전역에 공장을 설립했고 파리로 이사를 떠났다. 이후 경영에 손을 떼고 화약연구에 매진한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의 성능을 계속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연구 했는데 기존의 규조토를 대신할 새로운 흡수제로 콜로디온(니트로셀롤로오스를 알코올과 에테르 혼합액에 녹인 용액. 증발할 때 생기는 투명한 막이 상처를 보호해 줌)을 발견. 이를 통해 '폭발성 젤라틴'이라는 새로운 화약을 만들어낸다.
이는 일반 다이너마이트보다 폭발력이 훨씬 강했으며 세상은 다시 한 번 노벨의 연구 결과에 놀라게 된다. 이때가 1875년 그의 나이 42살때였다. 이후 알프레드는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으며 세계적인 대부호가 되었다. 노벨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러시아의 유전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하기 시작했는데 파이프 수송으로 원유를 옮기는 법까지 구상해내며 유전사업 역시 대박을 터뜨린다.또한 노벨은 이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화약을 연구한 끝에 1887년 연기가 나지 않는 무연 화약을 발명했다.
그러나 노벨은 항상 비록 화약을 만들긴 했지만 그가 원하는 세상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화약이 전쟁에 사용되면서 고통스러워 했고 힘들어 했다. 그러던 와중에
1888년 둘째 형 루드비히가 세상을 떠났고 1889년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다. 노벨 역시 쉰여섯 살로 나름의 허무함과 고뇌속에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에서 무연 화약의 제조권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했고 알프레드는 이 제의를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에서 이러한 알프레드의 행동에 일제히 비난을 시작했고 노벨은 하는 수없이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이동한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많은 재산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도우며 그의 죽음과 함께 사회에 돌려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덧 나이가 들며 몸이 쇠약해진 알프레드 노벨은 62살의 나이로 유언장을 꺼내어 한자 한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나의 재산 가운데,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재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 유언 집행인은 그 돈을 기금으로 하여 거기서 나오는 이자를 그 전해에 인류를 위해서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하며, 그 상금은 다섯 부문으로 나눈다.
첫째, 물리학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둘째, 화학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개선을 한 사람
셋째, 생리학이나 의학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넷째, 문학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다섯째, 국제 친선이나 세계 평화를 위해 이바지한 사람
이상 물리학과 화학 부문의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 과학 학사원에서, 생리 의학 부문 수상자는 스톡홀름 카롤린 의학 연구소에서 문학 부문 수상자는 스웨덴, 프랑스, 에스파냐의 학사원에서 평솨상 수장자는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에서 선정한다. 이상금은 후보자의 국적과 상관 없이, 각 부문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되는 사람에게 줄 것을 분명히 밝혀 둔다.
노벨 상의 탄생이었다.
<노벨상 수상식>
1896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은 세상을 떠났다.그의 나이 63세였고 그의 유해는 고향 스톡홀름에 부모와 동생 에밀과 함께 잠들었다. 이후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장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일부 노벨의 친척들이 재산으로 인해 유언장이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위임을 받은 학사원과 노르웨이 국회가 유언을 집행함으로써 노벨이 죽은 지 5년째 되는 1901년 12월 10일 제 1회 노벨상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다이너마이트 왕 노벨. 그가 죽은지 100년이 더 지났음에도 그가 만든 폭약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그가 죽을 때 전했던 유언이 세상을 바꾸고 있으며 지금도 세계의 시선을 한 곳에 모이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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