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비운의 왕 단종의 죽음

윤여시 2013. 9. 2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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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 단종의 죽음

단종은 아마 조선왕조 500년중 가장 비운의 왕이 아닐까 싶다. 역사가 만든 비극에 죽어야만 했던 어린왕. 삼촌의 손에 왕위에 밀려나 저 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어 살다 끝내 그 목숨마저도 잃게 되는 왕.. 항상 나약하고 어린 왕 단종이기에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 같다. 단종 그는 누구일까? 

 

 

역사의 비극.. 단종..

1. 단종 어머니를 잃다

 단종은 세종 22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단종을 낳고 단종의 어머니이자 문종의 부인이며 세종의 며느리였던 현덕 왕후 홍씨가 눈을 뜨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는데 이에 세종대왕은 어린 세손 단종을 너무도 아꼈고 고심 끝에 세종의 후궁이자 조모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혜빈 양씨는 어린 세손을 젖을 주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유모에게 맡길 정도로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고 그때문인지 단종은 무럭무럭 자라 세종30년 단종 나이 8세에 세손에 책봉된다. 어린 세손을 너무도 사랑한 세종은 세손을 직접 안고 집현전에 방문 했는데 후에 사육신이 되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에게 세손을 소개하며 단종의 앞날을 부탁했다고 한다. 

세종 역시 나이가 들어 병세가 악화돼 죽음이 얼마남지 않던 상황이었고 자신의 맏아들 문종 (이때는 세자) 역시 몸이 약해 세손 단종이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단종하면 생각나는 정태우. 많은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어린 단종을 만날 수 있다.  

2. 할아버지 세종도 아버지 문종도 세상을 떠나고 수렴청정할 대왕대비 할머니도 없었다.

죽음을 앞둔 세종은 특히 자신의 둘째 아들 수양을 비롯해서 많은 자신의 아들들 사이에서 커가는 단종을 너무나 걱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후 세종은 1450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병약한 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홍위(단종의 이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 되게 되는데 이때 나이 10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문종 역시 왕위에 오른지 2년 3개월 만에 김종서, 황보인 등 자신의 신임하던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한다고 유언을 남기며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12살의 나이로 세자는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단종이다.  12살의 나이로 단종이 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사실은 대왕대비나 혹은 왕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했지만 모두 세상에 없었다. 그러니까 단종은 그의 곁에 아무도 없던 어린 왕이었던 것이다.

세종이 인정했던 총명했던 단종이지만 문종의 유언에 따른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정본 우의정 김종서 등 의 고명 대신들이 나랏일을 해 나가면서 왕권이 많이 약해졌다. 점점 약해지는 왕권을 볼 수 없었던 수양을 비롯한 세종의 아들들은 이 같은 현실에 불만이 심했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게 된다.

 

 

아 어린왕 단종이여 

3. 삼촌 조카의 자리를 빼았다.

특히 점차 힘을 모아가던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그리고 세종이 아끼던 신숙주 등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드리며 때를 보고 있었고 이를 알아챈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 역시 이 같은 수양대군의 행동을 계속해서 감시하기 시작 했는데 때문에 당시 조정은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리고 결국 1453년 10월 일은 터지고 말았다. 먼저 움직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없애고 자신의 동생 안평 대군을 왕위에 세우려 한다는 구실로 김종서를 죽이고 황보인 등을 궁으로 불러들인것이다.

이때 궁궐 문 앞에는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가 살생부를 들고 서서 좌우로 나눠 많은 신하들을 죽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이다. 이 난으로 조정의 중요 대신들이 척살 당하자 수양대군은 영의정은 물론 왕을 대신해 일을 하기 시작하며 왕권과 신권을 모두 장악했으며 그 동생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나중에 죽이고 만다.

이후 단종은 모든 정치적 실권을 세조에게 넘겨주었고  세조는 이듬해 6월 다시한번 왕의 측근 및 종친 궁인들을 모두 유배시키며 겁을 줘 단종에게 옥새를 받아내게 된다. 수양대군, 세조가 즉위한 것이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4. 단종의 유배 강원도 영월... 그리고 사육신

단종은 처음에는 수강궁으로 그 처소를 옮겼다. 하지만 역사는 단종을 가만두지 않았다. 세종의 신임을 받고 단종을 목숨바쳐 보필하려 했던 집현전 학사 출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문관들과 유응부, 성승등의 무관이 단종을 다시 복위 시킬 거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특히 이 계획은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와서 당시 왕을 경호하던 별운검 자리에 유응부가 임명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사육신은 명나라 책사를 맞이하기 위해 당시 상왕 신분이었던 단종과 세조가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이때 세조 옆에 있던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책사 한명회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날 별운검을 세우지 않았고 거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실패에 같이 단종을 복위 시키는데 참여했던 김질이 겁을 먹고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 역모 계획을 고하게 되고 이 사건으로 이에 연루된 17인이 모두 잡혀와 7일만에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이 바로 사육신이다. 그리고 이번 복위 계획의 실패로 단종은 아무 죄도 짓지 않은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가게 된다.

 

 

단종의 묘.. 영월에 영원히 묻히다.

5. 계속 되는 단종 복위 계획과 단종의 죽음...

영월에 유배를 떠나 흐르는 동강을 보며 홀로 쓸쓸히 죽어 갈 것 같던 단종의 마음도 몰라주고 역사는 단종을 가만두지 않는다. 바로 또 한번의 단종 복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의 여섯번째 아들이었던 금성대군이 단종을 밀어낸 수양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떠날 처지에 놓이게 됬는데. 이에 금성대군이 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거사 직전 관노의 밀고로 금성대군은 반역죄로 처형 당하게 된다. 이들 뿐만 아니라 세조 집권 이후 모든 관직을 버리고 칩거하며 세조를 비판한 생육신은 물론이고 수많은 유생들이 조카를 밀어낸 세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명회을 비롯한 신하들은 이것이 다 노산군으로 추방되어 강원도 영월로 떠난 단종이 살아 있어서 그런 것이라며 그 목숨을 거두어야 한다고 세조에게 건의했고 세조는 결국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야사에 따르면 세조의 명을 받고 사약을 내리러 간 금부도사 왕방연이 오기전 이 소식을 먼저 접한 단종이 목을 매어 자진 했다고 전하는데 시신을 청령포 물속에 수장시켰으나 이를 안타깝게 여긴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단종의 묘가 있는 장릉 자리에 묻어 줬다고 한다. 물론 야사지만 단종의 비참한 죽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튼 비운의 왕 단종은 숙종에 이르러 다시 복위가 되며 비운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왕조에 이름을 올려 놓게 된다. 그는 마치 거센 물살에 휘말린 어린 아이처럼 거친 역사의 장난에 휘말린 17살 조선의 비운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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