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경주 배씨 시조!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

윤여시 2019. 10. 28. 21:24
반응형

경주 배씨 시조!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

우리나라에는 많은 성씨들이 있고 각 성씨마다 가장 먼저 처음 성을 사용한 시조들이 있다. 그런데 유독 고려가 막을 연 후삼국시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과 시조들이 많이 생겼는데, 아마도 그만큼 치열한 후삼국시대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도 많고 고려가 통일을 하는데 이바지 한 사람들에게 성을 최고의 선물로 하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중에서 경주 배씨의 시조인 배현경이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이 그토록 아꼈다는 배현경 그는 과연 누구일까?

 

배현경

|배현경 그는 누구인가?

배현경은 본래 경주사람으로 초명은 백옥삼이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담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궁예 휘하에 있을 때 이미 일개 병졸에서 마군장군까지 오른 대단한 장수였다. 

 

이후 궁예가 미쳐 포악한 행동을 계속하자 홍유,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모의하여 혁명을 일으켰고 그 공을 인정 받아 개국 1등 공신에 책봉된다.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배현경은 궁예의 수도였던 철원에서 다시 송악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고, 왕건은 이를 받아드려 배현경을 새도읍 건설의 총 책임자인 개주도찰사에 임명하였다. 


과감하고 강직한 성격을 가진 배현경은 왕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았는데, 왕건 역시 배현경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건의는 잘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예로 왕건의 측근 중에 청주 출신의 현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태조가 그를 호족 자친구을 관할하는 순군낭중(당시 정2품 벼슬)에 임명하려 하자 배현경은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배현경은 현율이 야전권을 쥐고 있는 순군낭중에 임명할 경우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을 한것이데, 고려 개국 직후 청주 순군리 임춘길 등이 이미 반란을 획책한 적이 있기 때문에 다시 청주의 사람에게 순군낭중을 임명하는 것은 옳지 못하는 일이라 했다. 왕건은 배현경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아끼던 측근 현율을 관리직인 낭중으로 고쳐 임명하게 한다. 

 

 

이처럼 배현경은 강직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고려 개국 이후 통일 작업이 계속되면서 그는 장수이자 중앙의 감찰 관리로서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재상격인 대광의 벼슬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고려가 통일을 이루던 936년 홍유와 같은 해 세상을 떠나니 삼국통일의 대업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배현경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간 왕건은 그의 손을 잡고 "아 천명이로구나, 하지만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그대를 잊으리"라고 말했고 왕건이 배현경의 손을 놓고 문을 나설 때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태조는 배현경이 죽자 국비로 장례를 치르게 했으며 '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고려의 4대 개국공신으로 태조의 묘정에 함께 배향되었다.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왕건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는 그 강직한 성품이 고려사에도 쓰여 있을만큼 놀라운 인물, 경주배씨의 시조로서 그 후손들에게도 자긍심을 주는 조상이리라 생각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