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우리나라 최초의 과거시험은 언제? 고려 광종의 과거제도 실시!

윤여시 2019. 12. 1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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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과거시험은 언제? 고려 광종의 과거제도 실시!

수능, 운전면허, 각종 취업시험까지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시험은, 피할 수 없는 것과 동시에 더 큰 길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요소다. 이는 단순히 현재뿐 아니라 옛날에도 그랬다. 옛 우리 조상들 역시 출세를 하려면 반드시 봐야 하는 시험이 있었으니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거시험이다. 

 

그렇다면 과거시험은 도대체 언제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되었을까? 

 

2019/12/14 - [국사/고려] - 호족의 힘을 약화하라 고려의 태평성대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무엇인가?

 

|광종, 과거시험의 칼날을 빼들다!

광종은 세상을 놀라게할만한 노비안검법 개혁을 한지 2년만에 멈추지 않고 또 다른 개혁의 일환으로 과거시험 제도를 채택한다. 노비안검법이 당시 호족들의 경제력을 약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과거제도는 호족들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킬 목적의 개혁안이었다. 

 

고려 건국 이후 호족 중심의 공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정에서 벗어나 과거를 거친 인재들과 신진관료들을 등장시켜 호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광종의 의지였던 것이다. 

 

|과거제도를 시행하자고 건의한 쌍기는 과연 누구일까?

과거제도는 광종 혼자 생각해 낸 것은 아니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라는 사람의 건의로 시작된 것인다. 쌍기는 후주에서 시대리평사라는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로써 벼슬을 지낸 경력이 있어 과거제도에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후주 역시 고려와 마찬가지로 건립된지 얼마 되지 않아 제후국의 힘이 막강했는데 후주는 당나라의 과거제를 비롯해 개혁정책을 실현하여 제후국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쌍기 역시 이같은 과정을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편, 광종은 후주의 개혁소식을 듣고 고려 역시 개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를 맡을 인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후주의 2대 왕 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에 사신을 보냈고, 이에 응답한 고려가 951년부터 후주 연호를 사용하고 2차로 고려 백관들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꾸기 위해 후주에서 책봉사를 보냈다.

 

바로 그때 책봉사를 따라온 인물 중 한명이 쌍기였다. 고려에 당도한 쌍기는 얼마 후 병에 걸려 사신 일행과 중국으로 가지 못하고 광종을 만나게 된다. 아마 이는 쌍기가 사신단을 돌려보낸 후 광종을 만나기 위한 계산이었을 것이다. 

 

|쌍기와 광종 과거제도를 시행하다

광종은 쌍기를 만난 후, 그의 개혁적인 모습과 식견에 감탄하여 쌍기를 고려의 신하로 삼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후주에 요청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후주 사람 쌍기는 고려조정에 등용된다. 

 

쌍기의 등용 이후 노비안검법이 곧바로 시행되고 고려는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쌍기는 등용당시 관직에 올랐고, 이를 알아챈 호족들이 반대했으나 광종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혁을 진행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958년, 쌍기는 과거를 주관하는 관직에 임명되고 과거시험이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첫 과거 시험이 바로 이때 열린 것이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과거를 연 광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론에 대해 기술하는 문제를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아 자신의 개혁의지를 들어내고자 했다. 이로인해 당시 고려 전국에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늘어나고 유교적 관료들이 조정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광종, 귀화인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다.

쌍기가 성공적으로 과거제도를 시행한 후, 광종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자신의 아버지 쌍철을 고려로 불러 개혁작업에 착수하였고, 쌍씨 부자가 고려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여 광종은 그들을 임용하였다. 

 

이에 당시 최승로를 비롯한 일부 관리들은 귀화인의 잇따른 임용에 우려를 표했으며 반발하였다. 그러나 광종으로서는 이미 노비안검법을 시시하면서 호족들과 등을 돌린 상태에서 호족들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귀화인들을 중용한 것이었다. 

 

이후, 광종은 귀화인들을 활용하여 더욱 거세게 호족들을 숙청해나가기 시작했고, 이른바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숙청정책이 시작되면서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작된 개혁의 칼날이 온 고려를 뒤덮게 된다. 

 


고려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자 왕권강화에 평생을 몸바쳤던 광종, 일종의 노비해방법이었던 노비안검법 그리고 과거시험의 개혁 역시 광종의 왕권에 대한 집념이 만든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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