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드라마 <정도전> 황금보기를 돌 같이하라 최영

윤여시 2014. 1. 1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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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도전> 황금보기를 돌 같이하라 최영 


KBS 드라마 <정도전> 을 보면 반지의 제왕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백발 간달프가 등장하는데 바로 서인석이 연기하는 고려 최영 장군이다. 아무래도 예전의 <태조 왕건>에서 서인석이 연기한 견훤 캐릭터와 겹치지 않기 위해 백발 컨셉을 잡은 것 같은데최영 장군그는 과연 역사 속에서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최영 장군을 연기하는 배우 서인석... 분장은 물론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보내고 있다.

 



|최영 장군의 어렸을 적..


최영 장군은 고려 후기의 유명한 학자이자 집현전 태학사를 지낸 최유청의 5대손이자 고려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이다. (그러고 보면 최영 장군의 집안은 전형적인 문관 집안이었다.) 최영 장군의 집안 자체가 고려초기 태조 왕권을 도와 고려 왕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고 그의 5대조였던 최유청이 집현전 태학사라는 지금의 문화부장관 자리까지 올랐던 지라 고려조 쭉 명문 가문 중 하나였다.  

 

여튼 최영 장군은 자신의 집안과는 다르게 유난히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여 어렸을 때부터 장군을 목표로 무예는 물론 병법을 익혔으며 혼란한 고려 말을 평정할 대장부로 성장한다. 또한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아버지 최원직은 최영 장군에게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말을 강조했고 최영 장군은 이 말을 평생의 그의 신조로 여기면서 살았다. ( 때문에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라는 말은 최영 장군을 가장 잘 나타내는 수식어가 되었다. )  




최영 장군의 초상화.. 무엇인가 굳은 의지가 보인다. 


|최영 장군의 활약


그는 무인으로서 양광도 도순문사 휘화에서 왜구를 수 차례 토벌하면서 첫발을 디디게 된다. 또한 최영은 공민왕을 어렸을 때부터 돌봐줬다는 명목 하나로 권세를 남용 했던 조일신을 처단하는데 공을 세우고 당시 원나라와 고려 북쪽에서 활개치던 홍건적 토벌에 나서 원나라와 함께 연합하여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원정에서 돌아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의 수복은 물론 이때 처음으로 고려 왕조를 뒤엎을 자인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이후 최영과 이성계는 혼란스러운 고려 왕조의 분위기 속에서도 북쪽의 홍건적과 남쪽의 왜구를 몰아내는데 앞장섰고 원나라 기황후의 지원을 받은 최유가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치자 최영이 이를 막아낸다. (기황후가 이런 여자였다.) 또한 강화도까지 올라온 왜구를 막아내고 개경까지 침략한 홍건적까지 정벌하여 고려를 구해냈다. 이러한 공에도 신돈의 정치공세에 6년간이나 유배길을 떠나지만 신돈이 처형 당한 후 다시 왕실로 돌아와 고려 왕실을 외부와 내부의 반역자들로부터 지키는 길을 걷게 된다.   



 


이민호도 최영이었다...



|최영 장군의 실수?


그런데 이 때 최영장군은 고려 왕조뿐 아니라 역사를 뒤바꿀 계획을 세우게 되니 이것이 바로 무너져가는 원나라와 떠오르는 명나라의 혼란 속에 놓여 있던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이다. 또한 이때 명나라는 이미 원나라를 몰아내고 이웃 나라들과 자신들의 영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민왕이 회복 해 놓은 철령 이북 땅을 다시 내놓으라고 고려 왕실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으며 최영장군은 아직 완벽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명나라라면 충분히 전쟁을 해 볼만 하다고 판단하여 우왕을 설득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이성계와 조민수 등은 아래와 같은 4불가론으로 요동 정벌을 반대하지만

 

1. 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은 어렵다.

2. 농사철에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

3. 군사가 북쪽으로 간 틈에 왜구가 쳐들어올 수 있다.

4. 여름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전염병과 활을 쓰기가 힘들다.

 

결국 최영의 강한 주장 때문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를 몰아 요동원정길에 나서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성계의 주장에 공감을 하나 최영의 비전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백프로 공감할 수 있다고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최영 장군은 이 순간 분명 사람을 너무 믿었고 방심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최영은 죽어 신이 되었을 정도로 최영을 믿는 무속신앙이 생겼다.

마치 관우 처럼...


|최영 장군의 몰락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을 떠난 이성계와 조민수는 비 때문에 불어난 압록강의 하중도인 위화도에서 군대를 물리고 있다가 회군하여 고려 왕실에 반기를 들자는 이성계의 설득에 조민수가 협력하며 고려 왕실을 무너트리는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게 된다. 이미 고려의 대부분의 군사를 이성계에게 내 준 최영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소규모 부대로 필사의 각오로 막으려 했으나 물량 부족으로 인해 패배하고 우왕은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후 최영은 합포로 다시 유배를 떠났다가 결국 개경으로 와서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참형을 당한다. 이성계는 모든 고려 백성에게 신망을 받던 최영 장군을 죽이기 위해 백성을 괴롭히는 무리한 요동정벌을 감행한 죄와 왕을 우롱해 권세를 탐했던 죄로 몰아 처형을 했으나 백성들은 참형을 당한 최영을 보며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최영 장군이 얼마나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영 장군의 묘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기슭에 있으며 윗묘가 그의 아버지 최원직의 묘이고 그의 부인과 합장되어 한 기의 묘로 되어 있다.


|최영 장군의 묘에는 풀이 나지 않는다?


최영장군은 억울한 죄목에 의해 참형 당할 당시 자신의 평생에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가 죽고 최영 장군의 묘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채 긴 세월을 지내고 있다가 1976년에 풀이 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풀이 잘 자라고 있다. 이 같은 이야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영 장군은 <삼국지>의 관우 처럼 민간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신으로 만들어졌으며 최영장군제는 물론 최영 장군의 사당과 굿당을 볼 수 있다.

 

(최영 장군 분명 무너져 가는 고려 왕실의 마지막 희망이자 훌륭한 위인이었지만 자신의 한 번의 상황 판단 실수로 인해 자신이 평생을 다해 지키려던 고려 왕조는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그의 굳은 신조와 이름이 아직도 역사에 남아 있듯이 그의 삶에서 요즘 사람들이 분명 배워야 할 것이 많고 지켜야 할 의미들도 많다고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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