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영화 포화속으로 실화 포항여중 전투

윤여시 2013. 9. 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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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화속으로 실화 포항여중 전투

빅뱅의 탑이 주연을해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영화 배우 차승원의 신들린 북한 장교 연기가 돋보였던 바로 그 영화 포화속으로가 실화인 것은 다들 알것이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라는 명언을 남기며 밀려들어오는 북한 정규군에 맞서 우리 국군과 학도병이 힘을 합쳐 맞서 싸운다는 내용 영화 포화속으로.... 그 실제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자.

영화 포화속으로 처럼 때는 북한이 이미 서울을 지나 마지막 대한민국의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까지 밀려 들어왔을때가 배경이 되고 있다. 이때 낙동강에서 밀리면 모든 것이 다 끝났기에 우리나라는 모든 사력을 다해 밀려오는 북한군을 막아내기 시작했고, 이에 북한은 우회 작전을 쓰기로 하고 포항에 군을 집결시키기 시작한다..

8월 초 무더운 여름 북한군 제 12사단은 우리 국군의 포항남쪽에 위치한 영일비행장은 물론 낙동강 전선의 동쪽 붕괴를 목적으로 포항방향으로 진군하게 된다. 영화에서 나오는 북한 766부대는 12사단 예하의 부대로 이들은 포항 서쪽에서 우리 국군을 밀어 붙인 다음 산악지대를 통해 기계면 쪽으로 들어오게 된다.  

<표시 된 곳이 기계면이다.>

북한의 무지막지한 돌파는 우리군을 당황하게 하고 북한의 12사단 5사단 766유격부대를 주축으로 동해 낙동강 지구는 40km이상 후퇴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사실상 포항은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그당시 수도사단은 (이떄 수도 사단은 지금의 서울을 지키는 수도사단이 아니다) 김석원 준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이때 그 밑에는 수백명의 학도병이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김석원 준장이 8월8일 수도사단에서 3사단으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학도병들에게 따르지 않아도 좋다고 하고 임의 해산을 권했다. 그러나 학도병들은 김석원 준장을 따르길 희망했고 약 71명의 학도병이 그를 따라 3사단으로 이동해 온다. 그리고 바로 3사단은 당시 낙동강 지역의 동북부를 방어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8월8일 새벽 포항에 도착한 학도병은 3사단의 후방사령부가 있는 포항여중으로 찾아가게 된다. 사실 3사단의 전체는 영덕에서 북한 5사단과 피튀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던지라 포항여중에 남아 있던 해군경비부의 요원 300명 및 경찰 청년방위대들만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이들은 바로 M1정과 400발의 실탄을 지급 받고 포항여중의 대기 상태로 명령을 받고 남아 있게 된다. 이들은 포항여중에 도착한 첫날은 자체적인 총기 훈련 및 총기 수입을 하고 포항여중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8월 10일 위에서 말한 북한의 12사단과 766부대가 우리 국군을 쳐 내려오면서 동해안전선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포항에 드디어 북한군이 출몰하게 된다. 이에 부랴 부랴 급하게 낙동강전선 동쪽을 막아야 하는 3사단은 후방을 지키기 위해 급하게 모은 병력을 급파하게 되고 해군 경비부의 300명 및 군경은 급파 본대에 합쳐 전투를 벌이나 포항여중에는 학도병 71명이 싸울태세를 갖추게 된다.

 

8월11일 새벽 4시 제3사단 후방지휘소 뒷산에서 신호탄과 함께 일제히 총성이 울린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 된 것이다. 모두 잠에서 깬 학도병은 2개 소대로 나뉘어 외곽에 배치 되었고 새벽이 다가오면서 북한군이 학교 정문 50m까지 접근해오자 학도병은 일제히 사격을 실시 북한군 20명을 사살시킨다. 그후 북한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곧바로 사격을 집중시키면서 학도병들의 항복을 권고 했으나 학도병은 이 말에 속지 않고 그대로 전투에 임한다.

새벽 4시부터 오후 1시까지 계속된 전투에 (물론 학도병만 있던 것은 아니며 우리나라 군경도 함께 했다.) 탄약과 수류탄은 모두 떨어지게 되고 학도병은 적이 던지는 수류탄을 맞받아 던지면서 끈질긴 혈투를 펼친다. 오후까지 이어진 전투에 북한군은 최후 공세로 장갑차 5대를 보내게 되고 2대가 교문을통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돌진하며 학도병들에게 큰 타격을 준다.

 

이 혈투 결과 우리 학도병은 적 50~60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얻었으나 71명중 47명이 장렬히 전사한다. 하지만 포항여중에서의 이 끈질긴 시간 지연은 국군 3사단의 후퇴결정을 이끌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3사단 및 포항 시민들은 이 시간에 형산강 이남으로 후퇴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3사단의 후방 물품들을 들고 구룡포로 철수 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전투가 끝난지 일주일도 안된 8월 16일 국군 1군단의 낙동강 방어선 지원으로 북한군 12사단의 병력규모를 1500명으로 줄여냈을 뿐 아니라 포항 북부에 방어선을 고착화 시켜 낙동강 방어선 동쪽라인을 지킬 수 있게 됬다. 이모든것이 포항여중의 영웅 학도병들이 있기에 포항을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를 외쳤던 탑.. 아니... 그들은 군인이었다... 우리나라가 가장 위험에 빠졌을때 우리나라를 지켰던 최고의 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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