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대표하는 책사이자 이방원의 오른팔 하륜 그는 누구인가?조선을 대표하는 책사이자 이방원의 오른팔 하륜 그는 누구인가?

Posted at 2021. 4. 15. 20:25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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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표하는 책사이자 이방원의 오른팔 하륜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기틀을 잡은 책사를 꼽으라면 바로 정도전을 떠올릴테지만, 사실 그보다 더 오래 살아 조선의 많은 것들을 만들어간 인물이 있다. 바로 하륜이다. 사실 하륜하면 마치 세조의 한명회 같은 모사꾼을 떠올리기 쉬울 테지만 그렇지 않다. 태종 이방원이 사랑했던 하륜 그는 과연 누구일까?

 

|하륜의 출생과 성장

 

하륜은 고려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의 아들로 1347년 태어났다. 하륜은 정도전, 정몽주 등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의 중심이었던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다. 그의 나이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당대 최고 정치가였던 이인복에게 그 영특함을 인정 받았다.

이인복은 하륜을 한 번 보자마자 자신의 아우 이인미의 딸을 하륜에게 추천하여 결혼을 성사시키니 하륜의 능력은 이미 인정 받았을뿐 아니라 당시 권문세족인 성산이씨의 사위가 되고 이색의 사제로써 신진사대부의 배경까지 누리고 있으니 그 앞길이 창창했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후 공민왕대에 권세를 움켜쥔 신돈을 견제하다가 파직되었고, 여기에 이인임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유배되기도 하고 최영의 요동정벌론에 반대하였다 귀양을 가는 등 떵떵거리면서 살 것 같은 배경속에서도 나름 풍파를 겪는 관직생활을 하게 된다. 또한 조선 이성계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나름 이색의 문하였던지라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지키려고 노력은 하지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는다. 결국, 조선이 건국하고 잠시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지만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도관찰사에 기용되어 관직에 오른다. 

 

|조선건국과 하륜 그리고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계룡산에 도읍을 옮기려 하자 당시 하륜은 풍수설을 근거로 하여 계룡산을 반대하고 지금의 신촌인 무악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요청하나 정도전이 이를 반대 묵살하여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조선에서 명나라에 표전문을 보낸적이 있는데 명나라가 이 표전문을 교정한 정도전을 소환해야 한다고 하자 하륜은 정도전이 이를 결자해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가지 않았고 결국 하륜이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이를 해결하고 온다. 즉 태조 이성계 아래에서 정도전은 하륜이 건드릴 수 없는 상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하륜에게 자신의 주군으로 보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방원, 당시 정안대군이었다. 

 

하륜은 이방원이 어떤 인물인지를 단번에 알아보고 그의 장인이었던 민제를 만나 이방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정안대군을 만난 하륜은 그의 심복이 된다. 하륜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차 왕자의난이 일어나기 전, 이숙번을 태종에게 추천하는데, 정도전이 왕자들의 권력을 약하게 하기 위해 사병혁파론을 내세우자 이숙번이 가지고 있는 병력을 통해 이방원을 호위함으로써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륜은 정도전이 이방원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가면서, 이방원과 송별연을 가졌는데 하륜이 취한척하고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아버렸다. 이에 이방원이 화가나 뛰쳐나가자 하륜이 뒤따라가 책략을 진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1398년 제1차 왕자의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로서 병력을 이끌고 이방원을 도우니 이후 정종이 즉위하면서 정사공신 1등에 올랐으며 출세하였고 2차 왕자의난에서도 이방간의 거병 계획을 미리 파악 후 선수를 쳐 이방원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태종 이방원과 하륜

 

이제 자신이 세운 형 정종에 이어 왕위를 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이방원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보고 울화통이 터져 고향 함흥 땅으로 돌아간 아버지 이성계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일화에 의하면 함흥차사를 거쳐 무학대사의 간곡한 청으로 겨우 한성에 다시 돌아온 이성계를 맞기 위해 이방원은 마중을 나갔는데, 하륜은 이때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이방원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하륜은 태상왕(이성계의)의 화가 풀리지 않았으니 막사의 중간 기둥을 굵고 수령이 오래된 튼튼한 나무로 만들라 건의 했다. 이때 이성계가 한성으로 돌아오다 이방원을 보고 분노해 활을 날렸으나 이방원은 천막의 기둥으로 숨었고 화살을 막을 수 있었다. 

이는 후에 살꽂이 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다.

또한 태조의 환영회때도 하륜은 이방원에게 내관으로 하여금 곤룡포를 입도록 간언했는데, 정종이 술을 올린뒤 정안대군의 세자 옷을 입은 내관이 태조에게 술을 따라 올릴 때 태조가 철퇴를 내렸고 내관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이후 태조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체념했다고 한다.

물론 이 같은 일화들이 사실은 아니겠지만 모든 것을 읽고 예측한 하륜이 이방원을 보호했다는 점은 역사속에서 이방원에게 하륜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바라 할 수 있겠다.

 

하륜의 묘, 묘 역시 풍수지리와 양식에 있어 귀중한 자료다

|하륜의 생애 후반

 

태종이 즉위하자 하륜은 자신의 생각인 '변통'을 말했는데, 이는 학문은 하나의 가치이며 이상향이고 그 이상향을 달성하기 위해 방법은 그 상황마다 달라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1401년 잠시 관직을 사임했다 다시 복귀하여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에 적극 가담한다. 6조 직계제로 판서의 권한강화와 시장에서 화폐 유통을 주장하여 재정을 확충하였고, 호패법, 신문고 설치 등에서도 나섰다. 

그러나 하륜은 부를 탐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뇌물을 받거나 무단으로 백성을 동원해 간척사업을 하는 등 자신의 사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그의 물욕이 민씨집안이나 공신 이숙번 등과는 다르게 태종 이방원의 의심과 견제의 칼날을 피해 제명을 살게 해줬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재물을 좋아하는 인기 없는 신하가 권력의 끝인 왕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튼 간에 이러한 성품과 하륜이 태종보다 20살이나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여튼 의심 많은 태종의 비호 아래 정치, 외교, 자신의 사익까지 추구하며 공신으로서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다. 이후 70살이 되던 1446년, 함길도의 조선 왕가 시조들의 무덤을 보러 떠났다가 돌아오던 중 관아에서 죽게 된다.


태종은 이소식을 듣고 3일간 조회를 하지 않고 7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애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륜의 묘는 경남 진주에 있는데 그 위에 부친과 조부의 묘도 함께 있다. 이 묘는 특히 봉분이 8각형으로 되어 있는 여말선초의 장례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후 세종은 "하륜은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재상으로서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일을 아뢸 때도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년) 12월 7일
그 아버지 태종에 비해 하륜을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여튼 역사속에서 하륜은 모사꾼 책사의 이미지가 강하나 태종이 자신의 장자방이라 칭송하며 하륜을 높이 평가함은 물론 정치, 외교 또 나름의 사익과 천수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으로 실용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정도전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임은 틀림 없다. 그렇기에 킹메이커로써뿐 아니라 하륜의 정치적 능력과 그 영민함은 분명 깊게 생각해볼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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