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서양

페니실린 발견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윤여시 2014. 12. 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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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 발견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인류는 끊임 없이 보이지 않는 균들과 싸워 왔고 또 지금도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싸워 나갈 것이라는 것을 부인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새로운 균들의 발견과 연구를 통해 인류는 생명을 더욱 늘려갈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목숨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 역시 인류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대목 중 하나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세균학의 역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아서는 안되는 인물이 있으니 페니실린을 발견한 그가 바로 알렌산더 플레밍이다.



 


플레밍이 태어났던 스코틀랜드 전원 풍경


|플레밍 유년시절


1881년 8월 6일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플레밍은 평범한 농사꾼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플레밍은 어렸을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전원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호기심을 키울 수 있었으며 또한 집안 형편이 어려움에도 그는 형, 누나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으면서 기초지식들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블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날, 런던으로 가서 병원을 열고 의사 생활을 하던 형 토마스로부터 런던으로 와서 공부를 하라는 편지를 받게되고 플레밍은 14세때 런던으로가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형 토마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생활하기 위해 상선에서 4년간 사무원으로 일하던 플레밍은 삼촌인 존플레밍이 죽어서 남긴 유산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런던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을만큼 뛰어난 성적을 자랑했다. 이후 플레밍은 여러 의과 대학을 놓고 고민하다가 세인트 메리병원에서 본격적인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플레밍이 공부했던 세인트 메리병원 지금은

임페리얼 컬리지로 런던의 대표 의과 대학이다.

 


|플레밍 병을 막기 위한 연구원이 되다


1906년 세인트 메리병원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의사가 된 플레밍은 우연한 기회로 세인트메리병원에 찾아온 당시에 유명 병리학자 라이트 박사의 강의를 듣게 된다, 라이트 박사는 당시 예방주사로 장티푸스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인물로 플레밍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 잡는다.  

이후 플레밍은 라이트 박사의 병은 걸리기전에 예방해야 한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게 되고 연구원이 되겠다며 라이트 박사가 있는 연구소에 들어가게 된다. 라이트 박사 역시 일찍부터 플레밍의 뛰어난 생각과 실력을 인정하고 병을 예방하기 위한 예방백신 개발과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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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다

 


|플레밍 1차세계대전  의무요원으로 참전하다

라이트 박사 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던 플레밍에게 1914년 발발한 세계1차대전의 소식이 전해졌고 대포와 탄환으로 인한 패혈증(핏속으로 균이 들어가 여러가지 염증을 일으키는 병)  사망자들이 속출하자 영국군에서는 라이트박사를 의료부 대령으로 임명했다. 이에 라이트 박사는 자신과 함께한 플레밍을 비롯한 연구원을 데리고 프랑스의 불로뉴의 야전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게 되고 플레밍 역시 이곳에서 장교로 근무하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바로 이때 플레밍은 병사들의 상처가 균의 감염으로 인해 썩어가는 것을 보게 되고 당시 사용하던 소독약이 상처를 더욱 심하게 만드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플레밍은 곧바로 실험에 착수하여 새로운 소독약 및 방부외과기술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플레밍은 이곳에서 야전 병원 간호사 사라 맥멜로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  세계1차대전은 비극이었지만 플레밍에게는 인생을 바꾸게 한 기회중 하나였다.



알렉산더 플레밍의 모습

 


|플레밍 '리소자임' 발견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온 그는 전쟁중 병사들의 상처가 곪는 것에 대한 이유를 알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구 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나 수많은 실험을 해도 플레밍은 원인 발견과 해결책에 있어서 많은 실패를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날 플레밍은 비염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콧물에 있는 병균을 직접 보기 위해 현미경으로 살펴보기 시작했고 이내 병균을 발견한다. 이어 플레밍은 이 병균이 무엇에 약한지 알아보기 위해 건강한 사람의 콧물을 자신의 병균 위에다 붓게 되고 신기하게 비염을 일으키는 병균이 죽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사람의 눈물에도 이같은 효과를 가진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달걀의 흰자위에도 이러한 물질이 있는 것을 연달아 발견한다.


이를 통해 플레밍은 모든 생물은 자기 몸안에 살균 작용을 하는 물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같은 물질을 '리소자임'으로 명명했는데 이후 계속된 연구로 꽃이나 채소에도 이러한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후 플레밍의 리소자임 발견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으며 세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플레밍의 위대한 발견 페니실린



|플레밍 '페니실린' 발견


1928년 플레밍은 런던 대학의 세균학 교수가 되었고 계속 연구에 연구를 집중하게 된다. 그러던 중, 플레밍은 세균을 배양하는 샬레 안에서 푸른곰팡이가 자란 것을 보게 되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우연히 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다가 마치 리소자임을 발견할 때처럼 푸른곰팡이에서 살균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푸른곰팡이는 리소자임을 훨씬 뛰어넘는 살균력을 보였고 이 같은 발견을 한 플레밍은 깜짝 놀란다. 


이후 플레밍은 페니실린과 관련한 연구 보고를 발표하게 되는데 실용성이 떨어지고 페니실린의 사용처를 알지 못해 처음에는 학계의 그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플레밍은 페니실린과 관련해서 지속적인 연구를 했고 쥐실험을 통해 그 효능에 확신한다. 이후 패혈증에 걸린한 환자에게 페니실린을 투여하여 효과를 보았지만 페니실린의 양이 부족해 결국 사망하는 것을 보고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을 위해 수소문 하던 중 미국의 록펠러 재단에서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을 도와주겠다는 연락을 취한다.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페니실린을 만들게 되었고 이는 세계2차대전에서도 큰 효과를 드러내며 많은 병사들을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 


그 유명한 세계2차대전의 몽고메리 장군 역시 병사를 살리는 페니실린에 대해 극찬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발견이 당시 얼마나 귀중했던 것인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이 페니실린은 하워드 윌터 플로리가 이끄는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팀에 의해 쉽게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플레밍은 이들과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또한 자신의 스승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한 라이트 박사의 연구소를 이어 받아 책임자가 되었으며 "병균을 직접 이는 약 보다 사람 스스로 병균과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노년까지 외치며 연구에 연구를 몰두 하다 1955년 일흔 네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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