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 시어도어 루즈벨트 그는 누구인가?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대통령을 뽑는다면 2명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서로 12촌이라는 머나먼 관계인 루즈벨트 가문의 두 대통령은 모두 미국인들이 꼽는 가장 훌륭한 대통령 인데 이번에는 뉴딜정책으로 잘 알려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아닌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나오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미국 제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일명 테디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유년기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온 루스벨트 가문은 당시 금융업과 무역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가문이었고 이어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멀지만 한 가문인 것으로 보아 가문 전체가 탄탄한 배경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천식은 물론 심한 근시로 시력도 안좋을 뿐 아니라 겉 보기에 너무 말라서 힘이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많고 기억력이 좋을뿐 아니라 끈기 있는 정신력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갖추고 있어 약한 몸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매일 운동과 신체 단련에 힘써 연약했던 몸 역시 노력으로 극복하여 대학에 입학할 때 쯤에는 남들 못지 않게 건강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귀여운 우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결혼과 정치 입문기
탄탄한 가문과 명석한 두뇌 그리고 정신력까지 갖춘 엄친아 루스벨트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로스쿨에 진학했다가 1년만에 그만두고 24살의 나이로 공화당에 입당. 파격적으로 어린나이에 정치에 처음 입문한다. 그는 정치 새내기에 입문하자마자 뉴욕주 하원 의원으로써 부당한 정치에 저항하고 같은 당이어도 옳지 못한 것에는 강하게 대항하며 이름을 알렸으나 같은 당에도 그만큼 많은 적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도 사랑이 찾아 왔는데 그녀는 앨리스 리라는 여성으로 루스벨트가 첫눈에 반해 그녀의 여러번의 강력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는 구애로 결혼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서도 루스벨트가 얼마나 끈질긴 성격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4년후 안타깝게도 앨리스는 아이를 낳자마자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고 어머니도 바로 세상을 떠났다. 루스벨트는 잠시 충격에 잠겨 일에 파묻혀 지내다가 2년뒤 어릴때 친구 에디스 커밋 캐로와 재혼 했다.
이후 다시 정치에 도전한 그는 1895년 37세의 나이로 뉴욕 주 경찰청장에 임명되어 그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는데 특히 정치인들의 부패 적발, 숙청하여 큰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해 미국 국방부 해군 차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파격적인 행보와 정책을 거듭해 성공시키며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이바지 하였고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자 루스벨트는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 하고 정부의 명령까지 무시하고 자원병 연대를 이끌고 전쟁에 직접 참전, 승리로 이끌면서 이후 선거에서 압승 뉴욕 주지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자원대의 스페인-미국 전쟁 참여 당시
|
|시어도어 루스벨트 최연소 대통령이 되다.
뉴욕주지사가 된 이후에도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능력 없는 공무원들을 모두 해고 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 있는 정치가로 이름을 날린다. 여튼 이러한 강하고 깨끗한 행보로 공화당 간부들은 루스벨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봤고 루스벨트를 몰아 내기 위해 대선을 도전하는 매킨리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루스벨트를 올려 그를 몰아내고자 했다. (당시 부통력은 실권은 물론 명예직이지 정치인생의 최종점으로 취급 받으며 아무 가치가 없는 자리였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정치 공세는 어느정도 맞아들어가 190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명연설과 인기 덕분에 결국 매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매킨리는 대통령을 루스벨트는 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 실권 없는 부통력직을 수행해야 하는 루스벨트로서는 씁쓸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일인가? 1년 후 대통령 매킨리가 임기도중 무정부주의자의 총격으로 암살 당하면서 루스벨트는 뜻밖의 대통령 자리를 이어 받아 승계하였다.그때 루스벨트의 나이 42세였다.
루즈벨트 대기업과의 전쟁을 선포하다!
|
|테디 루스벨트의 반재벌 정책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힘 넘치는 개혁을 실천해가고자 한다. 그는 정책이 아닌 자신의 생활부터 개혁의 생각을 드러내고자 백악관 개방은 물론 백악관의 다양한 각계각층의 손님들을 초대하며 생활에서부터 개혁정책을 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당시 팽배해졌던 대기업과 연관된 부정부패 척결과 독점기업에 대한 제재를 가할 준비를 하며 이른바 반재벌 정책을 펼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간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전 대통령의 암살로 인해 어부지리로 오른 대통령이 아니라 1904년 재선을 통해 당당히 국민에게 인정 받는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더욱 강력한 반재벌 법안들을 준비한다.
루스벨트는 재벌 리베이트 관행을 저지하는 엘킨스 법, 철도회사 독점을 맞는 헵번법 식품재벌의 비리를 막는 식품의약규제법 등은 물론 노동자들 편에서서 파업 지지를 하기도 한다. 또한 당시 미국의 부를 대부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건철강, 스탠더드 오일에 대한 소송제기와 승리로 독점 기업들의 해체를 가져왔으며 언론 역시 국민의 반재벌 정서에 가세에 보도하면서 루스벨트의 인기는 더없이 높아져간다.
이뿐 아니라 루스벨트는 미국의 국립공원의 숫자를 늘리고 환경파괴를 일삼던 산업화에 제동을 걸며 환경보호에도 앞장서서 환경분야에도 큰 인정을 받는 대통령이 된다.
루즈벨트의 외교정책 우리나라에게는 씁쓸했다
|
|테디 루스벨트의 외교 정책
루스벨트의 강력한 정책들은 외교에도 여실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당시 미국은 미국만을 생각한다는 외교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루스벨트는 이를 부인하고 아메리카에서 유럽의 영향을 모두 몰아내겠다는 미국 패권주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어 독일과 베네수엘라의 분쟁에 개입하고 도미니카에 간섭하며 남아메리카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남미국가들이 유럽국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부채를 갚아주는 정책을 펴며 '부드러운 말과 큰 곤봉'이 필요하다고 말해 이를 '곤봉외교'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지금까지도 미국의 큰 부를 창출하게 되는 파나마 운하에 영향력을 끼치고자 파나마 운하 공사권을 따내고 파나마의 운하를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는 콜롬비아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파나마의 독립을 뒤에서 밀어 나라로 만들어버려 미국의 영향력 안에 파나마를 두고 운하를 차지한다. 이것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표적 업적 중 하나였다.
또한 루스벨트는 오지랖이 넓은건지 이때부터 세계의 경찰을 자처 상관도 없는 러일전쟁을 중재하고 협상문제를 해결하여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되는데 뒤에서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통치를 허용하고 자신들은 필리핀을 갖는 계약을 맺어 놓은 상태였다. 루스벨트는 이처럼 미국의 힘을 믿었고 또 한편으로 힘이 없는 나라를 절대 봐주는 법이 없는 냉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얼굴이 있는 러시모어 산의 큰바위 얼굴 |
|테디 루스벨트의 이야기
이렇게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한 루스벨트는 태프트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차기 대통령으로 생각 밀어주었으나 경제 정책과 여러 정치적 오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이가 나빠진다. 이후 태프트와 결별 공화당을 탈당해 진보당을 결성하했으나 이는 공화당 표까지 잡아먹으면서 신생 정치인이어도 과언이 아닌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에게 대통령을 헌납한다. (이때 루스벨트의 대통령 유세 당시 독일의 청년에게 총격을 당했으나 그가 걸고 있던 목걸이와 연설뭉치 때문에 겨우 살아남았다)
대통령 낙선후 루스벨트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탐험은 물론 여러 책을 저술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그 몸은 늙었지만 브라질의 강을 탐사하는 등 강인한 모습을 잃지 않으며 많은 미국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이때 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또다시 참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려 했으나 미국 정부가 제재 하자 자식들의 참전을 종용, 이때 막내아들이 전쟁중 죽고 만다. 그리고 막내아들의 전사 소식은 나이든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는 큰 타격이었고 거동이 불편해져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대통령 재선에 대한 꿈을 잃지 않고 끊임 없이 집필활동을 하며 멈추지 않는 미국인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지만 1919년 1월 6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테디 루스벨트로 불리는 이유?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보면 알수 있듯이 루스벨트에게는 테디라는 일화가 있다. 1902년 미시시피 주로 곰사냥을 떠난 루스벨트가 큰 소리 친것과는 다르게 곰 사냥에 실패하자 보좌관들이 새끼곰을 잡아다 주었고 사냥에 성공한 것처럼 총을 쏘라고 전했지만 루스벨트가 이를 거절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위싱턴포스트 기자가 보도 했고 뉴욕주의 한 장난감 가게 주인이 진열대에 전시한 곰 인형에 테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바로 테디베어의 유래였고 1년 뒤 리차드 슈타이프가 테디베어를 고안. 테디베어가 탄생했으며 루스벨트의 애칭에도 테디베어가 들어가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루스벨트 본인은 테디라는 애칭을 너무나도 싫어 했다고 한다.
'세계사 > 서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대륙의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첫 항해 (0) | 2015.04.09 |
---|---|
최초의 아메리카인 인디언 그들은 누구인가? (0) | 2015.03.30 |
페니실린 발견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0) | 2014.12.27 |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0) | 2014.12.14 |
실화 모세 그는 누구인가? (0) | 2014.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