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당파정치의 중심 이산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윤여시 2015. 2. 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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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정치의 중심 이산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조선 선조 시대를 다룬 사극은 사건으로 보면 임진왜란을 인물로 보면 왕실의 선조나 광해군이나 이순신, 류성룡등을 주로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바뀌며 이야기가 진행될지라도 이 시대 정치를 대표하는 신하중 가장 비중있게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이산해이다. 이산해 그는 과연 누구일까?  





KBS1 드라마 <징비록> 이산해역의 이재용

 


|이산해의 가문과 유년시절


이산해는 1539년 중종대에 태어났다. 이산해의 가문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명문가문으로 이산해는 고려말 최고의 성리학자 이색의 7대손이다. 또한 이산해의 아버지는 군수였지만 이산해의 사촌 동생은 당시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장가 이산보였으며 그의 작은아버지는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이었으니 진정한 로열패밀리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이산해는 어렸을 적부터 작은아버지였던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재능과 지혜 또한 남달라서 어렸을적부터 천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이지함도 이산해의 재능이 너무 아까워서 자신이 아닌 이황의 서원으로 보내 제자를 삼게 하였다. 이뿐아니라 이산해는 글씨도 잘 써서 명종이 자신의 앞에 불러 직접 글을 쓰게 했다고 하니 이미 일찍부터 준비되어 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산해는 이미 5살때 시를 지었고 6살때 글씨를 잘써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15세가 되기 전 향시에서 장원을 휩쓸며 모두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이 같은 소식에 명종 시대에 외척으로 권세를 누리던 윤원형이 이산해를 자신의 사위로 맞아드릴려고까지 했다고 하니 이산해... 정말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 이산해

 


|관직에 들어서서(초반)


이미 어렸을적 자격은 되었으나 대과에 응시하지 않으며 조정에 들어서지 않던 이산해는 성균관 유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1561년인 22살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권지로 조정에 입시한다. 그는 이후에도 그능력을 인정 받아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었으며 그해 경복궁 대액의 글씨를 섰으며 1563년 홍문관 정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홍문관 박사가 되었다.


이후 이조좌랑, 직제학, 예문관 응교등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여러 보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역량을 쌓은 이산해는 유성룡, 정온, 정인홍 등과 함께 동인을 형성하여 당파 정치의 선두가 되었다. 1570년 (선조 4년) 이산해는 대사간이 된 이후부터 탄핵을 많이 해서 조정의 여러 인물들을 파직 시켰고 1577년 사간원대사간이 되어 반대편인 서인들의 비리와 의혹을 파헤쳐 공격했다.




왕의얼굴 이산해

 


|당파싸움의 선두주자가 되다


이산해는 선조때부터 본격화 되기 시작한 붕당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로 처음에는 유성룡과 함께 이황의 제자이자 동인의 대표로 서인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동인에 속해있던 정여립이 계획하던 반란에 동인들이 개입되있다는 의혹이 일어나자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은 이를 기회로 삼고 동인들을 밀어 붙여 동인들을 몰아내는 기축옥사를 일으켰고 이로써 조정의 정권을 서인이 모두 잡는 듯 했다. 하지만 이산해, 유성룡 등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깊었던지라 동인들은 그 힘을 많이 잃기는 했지만 중심 세력은 간신히 그 정치적 끈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후 이산해는 서인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고 서인을 몰아낼 궁리를 하던 중에 좋은 기회를 잡게 된다. 바로 광해군을 세자로 삼자고 서인의 정철 등과 모의하고 반대쪽에서는 비밀리에 당시 선조가 아꼈던 신성군의 어머니 인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에게 사람을 보내 정철이 신성군을 몰아내려고 한다는 모함을 하여 선조에게 이 소식이 들어가게끔 한다. 또한 정작 정철과 함께 충언을 하기로 한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삼아 궁에 나가지 않는 계책을 썼다. 이후 이를 알지 못한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한다는 간언을 선조에게 하였고 분노한 선조는 그 자리에서 정철의 파직을 명했으며 윤두수, 윤근수와 같은 서인의 중심세력이 몰락했다.


하지만 이후 동인내에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유성룡, 우성전 등은 정철의 선처를 호소하며 귀양보내는 것으로 끝내자는 온건론을 펼쳤고 이산해와 정인홍은 지난 정여립의 난을 떠올리며 서인을 완벽히 몰아내기 위해 정철을 사형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쳤다. 해서 이 일을 계기로 동인은 이산해가 이끄는 강경파 북인과 유성룡이 이끄는 온건파 남인으로 다시 나누어지게 된다. (조정에서 이산해와 대립하던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어  '남인' 이산해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어서 '북인'이라 칭해졌다. 또한 후에 북인은 다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졌고 이산해는 대북의 편에 서는 등 당파싸움의 귀재로 그 힘을 더했다.


여튼 서인의 몰락 이후 이산해가 이끄는 강경론의 북인이 다시 승리하면서 조정은 온통 이산해의 세력으로 가득 찼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고 조정을 잘 못 이끌었다는 이유로 여러곳에서 비판을 받는다. 또한 유성룡 등의 남인 역시 이산해의 죄를 물어 귀양 보내기를 주청하였고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산해를 귀양보내게 된다. 하지만 귀양지에서도 북인의 최고 권력자로서 실력을 행사했고 이순신이 유성룡, 권율과 친분이 있자 원균을 지지 옹호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1595년 선조의 특명으로 다시 관직을 돌려 받은 이산해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북인이 이산해 이이첨 등의 대북, 남이공 김신국 등의 소북으로 분당 되었으며 대북은 다시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의 다툼이 발생해 이산해의 육북, 홍여순의 골북으로 분열되니 그의 정치인생은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게 된다.


이후 빠른 상황판단으로 광해군을 왕위에 올려야 한다는 대북의 편에 서서 소북의 음모를 사전 차단하고 옥새를 광해군에게 돌아가게끔 만들었으며 은퇴하고 1609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충남 예산에 위치한 이산해 묘



이번 징비록에서 개인적으로 이산해가 가장 기대되는 이유는 그의 정치 인생이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며 한시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위해 끊임 없이 세력을 만들고 상대를 공격했던 이산해였기에 징비록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정치의 뒷면을 알려줄지 정말 기대가 많이 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보다는 당파 정치의 귀재로서 알려지긴 했지만 우리 정치사에 있어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 이면의 정치가 세력싸움이라면 그는 무패를 자랑하는 백전노장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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