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정승 황희
조선왕조 역사상 최고의 신하이자 정승으로 뽑히며 여러 왕을 섬겼던 황희..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만들어내며 왕 바로 밑의 정승의 자리에서 근 20년간 그 능력을 인정 받았던 황희.. 그래서 그의 이름 옆에는 항상 정승이라는 직책이 따라다닌다.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조선을 넘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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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유년시절
황희는 1363년 고려 말 공민왕 시대 자헌대부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희의 집안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였던 황경의 자손으로 고려시대 때 쭉 관직에 올랐던 집안이었다. 하지만 황희의 어머니는 정실부인이 아니었기에 황희는 가문의 덕을 많이 본 것은 아니였다.
어렸을때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였던 황희는 태생부터 총명했으며 키카 크고 풍채 또한 좋았다. 때문에 일찍부터 그 부모는 물론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황희는 큰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황희는 이미 열네살때 고려의 음서제도(부모의 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을 얻음)를 통하여 복안궁 녹사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황희는 녹사 벼슬이 자신의 실력으로 얻은 벼슬이 아닐뿐더러 자신 역시 공부에 대한 욕심 있었기에 녹사일을 하면서 열여섯살에 결혼을 한 후 2년동안의 벼슬자리를 내려놓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1383년 스물한 살 때 진사시에 합격 하였고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하게 된다.
|황희와 농부의 일화
황희가 진사의 자리에 있을때였다. 황희는 오랜만에 말미를 얻어, 부모가 있는 개경으로 가는 길이었다. 뜨거운 여름인지라 황희는 들판을 지나다가 나무 밑 그늘에서 잠시 쉬려 하였는데 저쪽 들판에서 누런소와 검은소 두마리를 이끌고 밭을 갈던 늙은 농부가 다가 왔다.
그러자 황희는 늙은 농부를 향해 "저 소 두마리 중 어떤 소가 가장 일을 잘하냐고" 물었는데 농부는 당황해 하며 말을 하지 않다가 황희에게 귓속말로 '누런소가 더 힘이 세서 일을 잘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황희가 의아해하며 그냥 말하면 되지 왜 귓속말까지 하느냐고 묻자 노인은 "허허허... 젊은이 아무리 짐승이지만, 어느 놈은 잘 하고 어느놈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겠소?"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 황희는 정신이 번쩍 들며 짐승이든 사람이든 남과 비교하며 못한 점을 들추어 내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지. 라며 교훈을 얻었다고 전해지며 이 교훈 하나로 평생동안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까지도 신중하게 하였다고 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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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 그리고 황희
황희는 1389년 별장으로 재직하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에 보직 되었다가 3년 후인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이에 반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겠다며 개경 송악산 아래 두문동에 은거한 72명의 충신 들과 함께 황희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겠노라 다짐했다고 하는데 새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인재를 모으고자 두문동에 사람을 보내 인재를 얻기를 희망한다. 이에 두문동에 모여 있던 충신들은 가장 나이가 어렸던 황희를 내보내 백성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는데 황희는 거절 하지 못하고 조선의 관직에 나가게 된다.
이후 1394년(태조 3년) 성균관학관 벼슬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성품이 워낙 강직하여 파직과 복직을 두루 겪는다. 특히 황희는 왕이라고 해서 자신의 소신을 말하는 것을 주저 하지 않았고 이 같은 강직함으로 인한 파직이 대부분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황희가 조선의 명재상 반열에 오르게 된 이유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치며 왕위에 오르면서부터이다.
드라마 <대왕 세종>의 황희역을 맡은 김갑수 |
|황희의 전성기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5년 째 되는 1405년 지신사(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던 으뜸 벼슬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인 박석명이 태종에게 나이와 건강상의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뜻을 밝혔고 박석명은 그 후임으로 황희를 태종에게 천거하게 된다. 태종 역시 황희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온터라 박석명의 제안을 받아들여 황희를 지신사에 임명하게 했는데 이때부터 황희는 조정에서 승승장구를 하게 된다.
지신사를 역임 하고부터 황희는 그 정치적 수완과 능력을 비로소 펼치기 시작하였고 태종은 갈수록 황희를 아껴 공신 대접까지 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특히 날마다 황희를 불러 나라 일을 의논했다고 전해지니 자신의 형제를 모두 죽였던 잔인했던 태종이지만 황희에게는 정사를 돌보게하고 의논하며 비밀을 공유할 정도로 대단했다.
이후 황희는 형조, 병조, 예조, 이조 판서를 두루 걸치며 나라일을 도맡는다. 또 1408년 중전의 외척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민씨 일파를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때 황희는 앞서 상소를 올리며 비판하는데 앞장 서 태종의 신임을 다시 한 번 얻었고 명나라를 다녀오며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한 육조를 연임하며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앞장서며 조선 부흥기로 가기 위한 밑바탕을 다져놓는다.
<대왕 세종> 양녕대군 |
|황희 파직 당하다
태종에게 세자 문제로 노여움을 사게 된다. 당시 태종의 맏아들이었던 양녕대군이 세자로 정해져 있었는데 양녕대군은 다들 아시다시피 자신의 동생이자 태종의 세번째 아들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고 일부러 망나니 생활을 한다. 이에 태종은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 줄 수 없다고 판단 양녕을 폐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결심한다.
이에 태종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신하들에게 세자 폐위에 관해 그 의견을 물었는데 이를 눈치챈 신하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그 누구도 반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황희가 나서며 "정해진 세자를 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간언하며 태종의 뜻을 반대 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황희가 강력히 자신의 뜻을 반대하자 태종은 노했고 그의 벼슬을 공조판서로 낮추더니 이듬해에는 평안도 도순문사로 내보냈다가 형조판서로 다시 부르는듯하더니 다음 해인 1418년 판한성부사로 벼슬을 낮추었다.
그리고 1418년 6월 태종은 마침내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웠다. 사실 황희 역시 충녕이 성군임을 이미 알아챈지 오래였으나 왕위를 계승하는 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걱정하여 양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가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식으로 계승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었다. 여튼 충녕이 세자로 임명된 이후, 평소 황희가 태종의 신임을 받던 것을 질투한 조정 신하들은 태종에게 황희를 귀양보내야 한다며 강하게 상소를 올렸고 강한 반발에 태종은 하는 수 없이 황희를 파주로 귀양 보내게 된다. 이때 황희의 나이가 56살이었으니 그때 나이로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황희가 유배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전주의 <광한루> |
|황희 세종의 부름을 받다
황희가 파주로 귀양 간 후 조정의 황희를 시기하는 무리들은 황희의 귀양지인 파주가 한양과 너무 가깝다 하여 그를 더 멀리 보내기로 원하였고 태종은 하는 수 없이 황희를 남원으로 귀양 보낸다. 하지만 태종의 배려로 가족과 함께 유배 생활을 보내게 된 황희는 책을 읽고 시를 쓰며 힐링 아닌 힐링타임을 보내게 된다. (황희는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이때 만들었다.)
이후 태종은 1419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황희를 복직하게 해달라는 건의를 하였고 세종 역시 이를 받아드려 1422년 3월 관직의 복귀를 명했다.1423년 5월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백성 구휼에 힘썼으며 강원도 지역에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백성들과 세종 역시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이렇게 쭉 관직생활 동안 혜안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공을 세운 황희는 1431년 그가 예순아홉살이 되던 해 정승인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세종 역시 그 아버지 태종과 마찬가지로 황희에게 정사를 의논하며 많은 도움을 받아고 전해진다. 황희는 18년 동안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농사에서부터 국방강화 정책까지 진행하여 김종서와 최윤덕을 중용하였고 4군 6진을 개척 할 것을 건의 하였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법령 보완집인 <경제육전>을 편찬 감독하였다.
이후 황희는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여 세종에게 끊임 없이 관직에서 물러날것을 원했으나 세종은 계속 이를 거부하다가 자신이 죽기 4개월전까지 황희에게 일을 시켰으며 마침내 허락하니 이때가 1449년 황희의 나이 87세였다. 이후 황희는 은퇴하고 고향에서 3년을 더 살고 90세까지 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파주에 위치한 황희 묘 |
|인간이었던 황희 (황희와 관련된 이야기들)
조선 정승중 최고의 청백리라 불리는 황희에 대한 일화는 너무나도 많은데 황희의 맏아들 치신은 이미 출세하여 호조 판서의 벼슬에 올라 있었는데 오랫동안 작고 보잘 것 없는 집에서 살다가 새집을 짓게 되고 황희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기로 하였다.
황희 역시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집 밖에서 그 규모를 확인한 황희는 노하며 가마를 돌리라 명한다.이에 깜짝놀란 황치신이 황희에게 어딜 가시냐고 물었더니 황희는 황치신을 나무라며 아무리 호조판서라고 하지만 정직하게 살았다면 그 집을 짓지 못했을거라며 호통을 쳤고 이에 치신이 그 집을 되팔아 어려운 사람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는 셋째 아들 수신이 공부도 하지 않고 기생에게 빠져 살았는데 이를 알았던 황희가 수신을 꾸짖었다. 하지만 수신의 이러한 행동은 고쳐지지 않았고 황희는 꾀를 내어 수신을 기다렸다가 공손히 맞으며 "너를 자식으로 대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음이라 그래서 손님의 예로 너를 맞을 수 밖에 없구나" 하며 허리를 굽혔고 이에 놀란 수신이 맹세를 하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한다. 이후 수신은 세조에 이르러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전해진다.
물론 황희에 대해 비리나 간통 같은 안좋은 기록도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나 확인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다루지 않았다.. 또한 태조부터 세종까지 그 어떠한 벼슬에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그 훌륭한 세종이 황희가 87세의 나이임에도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조선에 필요한 인재 였으며 깨끗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일 것이다... 현재 국무총리 청문회마다 사건 사고가 터지는 지금 이 순간 황희 정승의 인생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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