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장군과 탄금대 전투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부산을 함락하며 기세 등등한 왜군은 당시 조선 조정의 예상과는 다르게 승승장구 북진을 하며 한양으로 급속히 올라온다. 놀란 조선 조정은 당시 가장 인정 받던 신립을 장수로세워 왜군의 북진을 막게 하는데... 과연 신립은 누구고 그가 펼친 탄금대 전투는 무엇일까?
신립 장군 |
|신립은 누구?
신립은 1546년 명종대에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 신씨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이며 그의 어머니는 파평윤씨였으니 고려시대 개국공신인 윤신달을 생각할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두 고려시대 명문 가문이 결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신숭겸의 5대조 할아버지는 신개로 조선초 좌의정을 지냈으며 그 후손들 역시 대대로 조선왕조에서 높은 벼슬에 있었기에 신립은 당시 이름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신립은 1567년 2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 벼슬에 올랐으며 1583년 은성부사가 되었다. 신립의 최고의 전공은 당시 북방을 위협하던 여진족 니탕개를 무찌른것인데 본래 니탕개는 조선의 최북단 6진에 드나들며 조선 조정에서 관직을 받기도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부족들을 규합하여 아산보와 안원보를 침입 점령하고 조선의 여러 장수를 물리치는 골칫거리로 변했다. 이에 신립은 자신이 자랑하는 기병 500여기를 동원해서 니탕개가 이끄는 1만 여진족을 물리쳤고 이 승전보를 계기로 당시 조선의 명장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신립은 1587년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로 명령을 수행하여 토벌에 나섰다가 왜군이 물러나자 돌아오면서 양가 처녀를 첩으로 삼아 파직되기도 했다. 또 이후 한남절도사에 등용되었다가 졸병을 죽이면서 파직 한직으로 전임되기도 하는 등 여러 굴곡도 있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신립은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을 입수하여 그 위력에 걱정하자 신립은 "조총의 정확성이 떨어져 쏘는대로 맞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비변사에서 왜군의 침입을 걱정하며 열린 회의에서도 "왜적은 수전에 능하기 때문에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 등 안타까운 상황 판단력을 보이기도 했다.
징비록에서 신립 장군 역을 맡은 김형일 |
|임진왜란 발발 이후
마침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왜군에게 무참히 짓밟히면서 조정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당시 신립과 함께 명장으로 불리던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보내 왜군을 막도록 한다. 하지만 이일은 상주에서 왜군의 기세를 보고 싸우지도 못하고 살기위해 달아나면서 상주마저 함락 당하며 순식간에 조선의 남쪽이 왜군의 군화발에 짓밟혔다. 이에 다시 조선 조정은 신립으로 하여금 더이상 왜군이 북진하지 못하도록 출전시켰고 선조는 검까지 하사하며 신립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낸다.
당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징비록에서 8천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선조실록의 8천명과 징비록에 기록된대로 충청도에서 합류한 8천명까지 합하면 약 1만6천명까지 볼 수 있을만한 군세였다.
1592년 4월 26일 신립은 군대를 이끌고 마침내 탄금대에 도착하고 상주패전 장수 이일을 만나 함께 합류한다. 이때 신립을 따라온 종사관 김여물은 문경세재의 길목을 막아 왜군을 물리치자고 말하나 자신의 기병의 힘을 믿은 신립은 기병이 활약하기 좋은 충주의 평야에서 왜군을 맞서 싸우자고 말한다. 또한 함께 했던 이일 역시 오히려 충주에서 물러나 한강 유역에서 적을 격퇴하자고 했으니 세 장수의 의견이 모두 달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적을 막기 가장 좋은 험난한 문경세재를 포기 한것을 보고 왜군을 이끄는 고니시유키나가가 문경세재를 지나면서 다행히라 여길 정도였다고 하니 신립의 판단이 아쉬운 대목이다.
탄금대 모습 출처: 문화재청 |
|전투의 진행
무사히 문경을 통과해 충주에 접어든 일본군은 신립보다 이틀 늦은 1592년 4월 28일에 입성했는데 신립은 27일 밤에 왜군이 도착했다는 말을 정찰병에게 듣고 급히 주둔해 있던 충주성을 나가 단월역 마을로 들어가 살폈지만 왜군이 없어 정찰병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튼 일본의 역사서와 충주의 역사 향토지 '예성춘추를 보면 신립과 일본군의 전투지역은 결국 달천 평야로 기록 되어있다.
4월 28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유키나가는 지금의 충주 건국대캠퍼스가 있는 단월역에 진입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민가에 불을 질러 신립을 자극했고 신립은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로 출격한다. 조선 신립은 자신이 이끄는 기병과 왜군보다 숫자가 많은 군세를 믿고 자만 했는데 고니시유키나가는 자신의 부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조선 군대를 무찌를 계획을 세운다.
먼저 중군 7,000명은 고니시가 직접 지휘하여 깃발을 내리고 사기를 잃은 듯 조선군을 향하여 진군하게 하고 고니시 사쿠에몬, 고니시 루이스가 이끄는 기동 병력 3700명은 신립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방비가 약해진 충주성을 침입하게 하였다. 소오 요시도시가 이끄는 좌군 5,000여명은 달천강을 따라 북상하여 조선군의 서쪽을 공격했고 마쓰라 시게노부가 이끄는 우군 3,000명은 조선군의 동쪽을 공격했다. 고니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가토군은 남한강을 건너며 전장을 관람한다.
신립은 단순히 왜군이 고니시가 이끄는 7,000여명의 중군이 모두인줄 알고 기병을 통한 학익진으로 중앙군을 포위 섬멸하겠다는 심산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달천평야는 당시 축축히 젖어있어 마치 늪처럼 변해있었고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궁기병으로 기세를 잡으려는 신립의 군대는 혼란을 겪는다. 이때 엎친데 덮친격으로 축 쳐져 있어보였던 고니시유키나가의 중군이 한번에 기세를 올리며 진군해오자 조선군은 급속도로 혼란에 빠졌고 이에 왜의 좌군과 우군이 조총을 이용하여 한 번에 조선군을 덮쳐오자 8,000여명이 그자리에서 전멸한다.
모든 군대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신립은 충주성으로 다시 돌아가 막으려 하지만 일본군에게 충주성에 있던 조선군마저 무너지면서 신립이 이끄는 부대는 전멸했다. 결국 조선의 모든 군대는 모두 퇴각하기 시작했고 왜군에 의해 달천강까지 몰려가 강에 빠져 죽거나 왜군에게 참살 당한다. 이때 생존한 자는 이일을 포함한 4명뿐이었다 하니 실로참담하다 할 수 있겠다.
전투가 끝난 후 고니시는 공을 세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조선군 3000여명의 목을 베었고 항복자는 수백명만 받아들였다. 또한 신립과 김여물 역시 탄금대의 열두대로 뛰어내려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월탄에서 죽었다는 설 왜군에게 잡혀 참수 당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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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장군으로부터 유래된 '곤지암'
탄금대 전투 이후 겨우 살아남은 조선군은 자살한 신립의 시신을 거둬 현재 경기도 광주에 장사지냈는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신립의 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양이를 닮은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위치해 있었는데 이 근처를 지나가는 말은 말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한 장군이 근처를 지나다 신립의 묘소를 찾아가 왜 사람들을 괴롭히냐고 말하자 갑자기 폭우와 천둥이 치며 바위에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쪼개진다. 이후 바위의 기괴한 모습은 없어지고 그 곳에 연못이 생겼으며 큰, 연못, 바위라는 뜻의 곤지암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사실 신립은 당시 조선의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 받고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임진왜란 이전 여진족을 무찌른 후 기록에 남아 있는 행적이나 탄금대 전투의 대실패를 볼 때 그리 추앙 받아야 하는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탄금대에 뛰어들어 자결 했다는 이유만으로 신립 장군을 명장으로 부르기엔 그래서 안타까운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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