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명재상 한음 이덕형
선조와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한 드라마 <징비록>,<정명공주>에서 중요대신으로 등장하며 현명함과 강직함을 동시에 보여준 한음 이덕형.. 우리가 흔히 들었던 한음이라는 호에 비해 이덕형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그는 사실 굉장히 현명했다.
한음 이덕형 포근해 보이는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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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의 출생과 성장
이덕형은 조선 명종16년인 1561년 지금의 명동에서 태어났다. 광주이씨 가문의 외동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인품 역시 뛰어나 그야말로 매력이 철철 넘치던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민성이었고 어머니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전의 동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외숙부 유전의 집에 놀러가서 지내며 학문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다들 알다시피 이덕형은 그 친구 오성 이항복과 장난을 즐기며 여러 재치 있는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덕형과 이항복이 서당에서 공부할 때인데 둘을 가르치던 스승이 졸자 이덕형과 이항복이 스승에게 서당에 불이 났다며 깨웠다. 이 소리에 화들짝 놀란 스승은 무안했는지 "공자를 뵙고 왔다"는 변명을 했는데 얼마 후 이번에는 두 소년이 졸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승이 혼내려고 하자 두 소년은 "공자님을 뵙고 왔다고 말했다." 이에 스승이 "공자님이 뭐라고 했느냐"라고 묻자 이덕형과 이항복은 "공자님이 스승님은 본 적이 없답니다"라고 말해 스승을 골탕 먹였다.
여튼 이러한 구전설화를 남길 정도로 한음 이덕형은 총명했고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그를 일찍이 알아본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자신의 조카 이산해에게 이덕형을 사위로 맞아드리라 추천하였고 이산해가 자신의 둘째 딸을 이덕형에게 시집보내니 이덕형의 나이 이때가 16살이었다. 불과 16살때 당대 최고의 실권자이자 학자였던 이산해를 장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친구 이항복의 장인은 권율로 두 친구가 모두 당대를 호령하는 실권자들의 사위로 들어갔다.
여튼 이덕형은 결혼 후 3년이 지난 1580년(선조14년에) 그의 나이 19살때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때 이덕형과 함께 급제한 인물이 있었으니 친구 이항복과 병조참판 이정립이었다. 이후 그들을 '경진삼이라' 부르며 벼슬길에 오르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전해진다.
<드라마 징비록 이덕형의 남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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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의 벼슬길과 임진왜란
이덕형은 벼슬길에 오르자마자 그 총명함을 인정 받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에게 주목을 받았고 홍문관에 있다가 수찬, 교리, 이조정랑은 물론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까지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불과 31세의 나이로 대제학의 자리에 오르니 물론 이산해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 능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이덕형뿐 아니라 조선을 뒤집어 놓은 사건이 발생하며 회오리 속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피난을 떠난 선조의 어가를 수행하며 유성룡, 이항복과 함께 임진왜란 극복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덕형은 특히 외교에 집중했는데 대동까지 올라온 왜군의 일본 사신 겐소와 화의 교섭을 하러 홀로 배를 타고 왜군 진영까지 갔으나 화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덕형의 아내는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가 왜군에게 붙잡혔고 그자리에서 자결한다.) 하지만 이덕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선조의 명을 받아 원군을 청하러 명나라에 파견 되어 이를 성공시킨다.
이후 1593년 명나라 원군을 이끄는 장군 이여송을 수행하며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고 친구 이항복과 병조판서를 돌아가면서 맡으며 이조, 형조 등 요직을 두루 맡아 전란 극복에 최선을 다한다. 또한 그는 변덕의 왕 선조와 이순신을 비난하는 신하들의 모함으로 1597년 이순신이 하옥되자 이를 적극 변호하여 다시 이순신을 조선의 바다를 지킬 수 있도록 힘을 다하였는데 이 대목에서도 그의 지혜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빛나는 듯 보인다.
<드라마 화정 이덕형 역을 맡은 이성민> |
|임진왜란 이후 이덕형 그리고 죽음.
마침내 길었던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때도 이덕형은 당쟁보다는 국익에 앞서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특히 그는 유성룡과 같은 남인이었지만 그의 장인이었던 이산해가 북인이었기 때문에 당쟁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그는 국란 이후 수습에만 전념하며 37세의 나이로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4년뒤인 1602년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 때 그의 나이가 불과 41세에 불과했다.
이후 선조가 뒤늦게 얻은 적통인 영창대군을 세우고 싶어하며 조정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맞붙으며 당쟁이 심화되었지만 이덕형은 이에 신경쓰지 않고 국난 극복에만 최선을 다한다. 이후 갑작스럽게 선조가 눈을 감으면서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고 그를 지지했던 대북파가 실권을 잡자마자 소북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이덕형은 이때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유로 명나라가 광해군을 왕으로 인정해주지 않자 직접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광해군의 책봉 칙서를 받아온다.
그리고 이덕형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광해군때에도 영의정에 두번이나 올랐는데 하지만 광해군의 숙청작업이 임해군, 영창대군에게까지 이어지자 이를 친구 이항복과 함께 필사적으로 막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고 인목대비의 폐위마저 필사적으로 반대하다가 대북파들의 탄핵이 이어지자 병을 얻어 낙향한다. (웃긴 것은 이때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를 주장한 것이 이덕형과 먼친척인 이이첨이었다.)
이후 이덕형은 이항복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난 직후 1613년 52세의 나이로 죽고만다. 당쟁의 회오리속에도 능력과 그 총명함으로 재상을 여러번 지냈으며 오직 국난 극복과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이덕형.. 그가 왜 뛰어난 인물 인지는 징비록과 화정에서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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