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공직자가 본 받아야할 위인 오리 이원익

윤여시 2015. 4. 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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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가 본 받아야할 위인 오리 이원익


조선의 위기라 칭해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회오리 속에서 수많은 위인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양란을 모두 몸소 겪으며 쓰러져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오리 이원익이다.




오늘날 공직자의 표상 오리 이원익

<징비록>,<화정>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이원익 출생과 성장


1547년 함천도청 이억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원익은 왕실의 피를 이어 받은 전주 종실 사람으로 그의 고조가 태종의 서자인 익녕군 이치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가문 역시 왕실의 머나먼 종친중 하나로 명망 있는 가문이었으나 왕족으로서 인정 받은 것은 그의 아버지 이억재 대에서 끝났다. 이원익의 외가 역시 세조가 단종을 밀어내가 왕위에 오른 계유정난의 공신이었던 김질과 정창손 가문으로서 당시 대표적인 양반 가문이었다.


여튼 이원익은 8살때 일찍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갈고 닦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미 17세 때(1564년 명종 19년) 과거 생원시에 합격하는 비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았고 추후에 정승반열에 올랐을때 유난히 키가 작아 '키 작은 재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징비록 오리 이원익

 

 

|이원익 벼슬에 오르다.


이원익은 전형적으로 세력을 갖지 않고 맡은바 소임을 다하는 실무형 인물로서, 애초부터 욕심이 없고 성품이 소박했으며 사람들을 사귀기 보다는 자신의 맡은일에 대해 열중하는 이로 대표되었다. 이때 서애 유성룡과, 율곡 이이 등이 그를 일찍이 알아보고 이원익을 존경했다고 한다. 


이후 1573년 성균관 전적이 되었고 명에 다녀온 이후 예조랑에 뽑혔으며 황해도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황해도사로 있을 때 율곡 이이는 황해도 감사로 있었는데 그의 밑에서 일을 누구보다 잘 처리하여 율곡 이이에게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원익은 35세(1582년)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도승지와 영의정의 싸움이 일어나며 승정원에 그 책임이 있다는 탄핵론이 일어났다. 이에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의 책임이라고 했으나 이원익은 승지들 역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다 파직 되기도 했다. 다음해 그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5년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황해도 안주 목사로 다시 임명 되었고 양곡 1만석을 통해 백성을 구호하고 종자를 마련해 대풍작을 이루었으며 당시 백성들에게 양잠(누에 치는 법)을 보급하고 장려하였다. 또한 당시 백성을 괴롭히던 군정 역시 기간을 줄이고 횟수를 늘리는 제도 정비에 나서며 백성을 풍요롭게 했다. 이에 사람들의 그의 치적과 이름을 드높였으며 그의 일처리에 조정과 선조가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이원익은 처음에는 동인이었으나 동인이 이산해가 이끄는 북인, 류성룡이 이끄는 남인으로 갈라서자 류성룡을 따라 남인의 편에 서게 된다.




화정 이원익


화정 오리 이원익 역의 김창완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원익이 45세가 된 1592년 마침내 왜군이 조선을 침공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원익은 전쟁 직후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역임 했으며 피란가는 선조의 호송을 맡았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된 후 흩어져 버린 병사들을 수습하고 1593년 1월 명나라의 구원군 대장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운다. 또한 곽재우로 대표되는 의병들을 보살피고 이순신을 존경하여 선조의 멍청함과 간신들의 모략에도 끝까지 이순신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선조가 도성으로 돌아오고 점차 전란이 고착화 되기 시작하자 경상도로 내려가 근무하며 전란 극복에 최선을 다한다. 그 공을 인정 받은 이원익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 좌의정, 호성 2등공신에 책봉 되는 등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가 50을 넘어서 당시에도 장수한 편이었으나 그의 앞으로 생애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파란만장한 격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도 광명의 오리 이원익을 기리고 다양한 문화활동을 하고 있는 오리서원



|광해군의 즉위와 조정의 소용돌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 전체는 북인 중에서도 선조의 적자이자 어린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유영경으로 대표되는 소북파와 정인홍, 이이첨 등으로 대표되는 광해군 즉위세력인 대북파로 나뉘어 싸우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선조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마침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원익 역시 본의 아니게 남인의 신분이었지만 광해군의 임진왜란 전란 극복의 활약과 그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광해군을 일찍부터 지지하여 후에 소북파가 광해군과 그 세력에 의해 풍비박살이 날 때도 이원익은 그 공을 인정 받았다. 


여튼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간 지켜봐왔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발탁 했고 이원익은 영의정에 오르자마자 1608년 대동법을 광해군에게 건의 하여 이를 시행했다. 당시 광해군 정권에서는 남인이었지만 조정과 백성을 생각하는 정책을 펼치는 이원익을 지지 했으며 당을 떠나 이원익 역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공직에서 최고의 결과를 항상 만들어 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을 처형할 당시 이원익은 관용을 베풀어 달라며 광해군을 끝까지 설득하면서 당시 북인 세력의 불만을 샀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끝까지 말리다가 광해군의 불만도 샀다. 이후 1615년 그의 나이 67세에 인목대비마저 폐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원익은 끝까지 이를 보호하다가 홍천으로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자신의 고향 여주에 은거하면서 광해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병자호란


|인조 반정과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1623년 광해군 정권의 종말을 고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다시 조정에 부름을 받아 영의정으로 등용되었으며 이원익은 인조 정권의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서 큰 공을 세운다. 이후 광해군의 처형을 반대 했고 이원익은 인목대비의 분노를 잠재우려 끝까지 주청드리며 이를 막는다.


또한 인종반정 후 1년이 지난 뒤 인조정권에 공을 세웠지만 인정을 받지 못한 불만으로 난을 일으킨 이괄의 난으로 이원익은 77세의 나이에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공주까지 인조를 호송했다. 또한 이괄의 난 진압후 1627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이원익은 80세의 나이로 도체찰사가 되어 인조를 호송하며 다시 궁을 떠난다.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뒤에 그의 나이가 81살이었는데도 훈련도감을 맡는 중책을 맡기려 했으나 이원익은 나이 든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한사코 거절하여 벼슬에서 물러난다. 이후 1632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한양으로 잠시 올라온 것을 빼고 자신의 고향 금촌에서 생애를 보낸다.


그리고 2년 뒤인 1634년 그의 고향에서 그는 87세의 나이로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진정한 명재상이자 파란만장했던 세월속에서 최선을 다한 키작은 명재상 이원익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이원익의 묘소

 

 

|오리 이원익을 기억하며


사실 이번 드라마 화정이나 징비록에서 이원익은 주요인물에 속하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역사속에서 이원익은 그야말로 최고의 공직자이자 재상, 조선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각기 다른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을 선기면서 모두에게 그 능력을 인정 받았고 특히나 광해군 정권을 무너트리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광해군 시절 재상이었던 이원익을 불러들였다는 것은 조정안에 이원익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는 공직자로서도 맡은 바 임무마다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 냈고 그 자신 역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며 당시로서는 놀랄만큼 기나긴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부정재물을 착복한 적이 없을 정도로 깨끗한 삶을 살았다. 또한 그 역시 당이 있긴 했지만 조정 분란의 주범이었던 당파싸움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직 조정이 그릇된 길로 갈 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아깝지 않을만큼 충언을 서슴치 않던 훌륭한 인물이었다. 


이원익은 너무나 청렴하여 일화도 많다.


방 두어칸의 초가집에서 살았으며 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 5칸짜리 집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원익이 죽자 그의 장례식에 쓰일 관 값마저 부족해 조정에서 대신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이원익은 말년 유배 당시 돗자리를 만들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후 유배에 풀려 이원익이 영의정으로 다시 복귀하자 그가 만든 돗자리는 영상수직석이라 불리며 가치가 귀해졌다고 한다. 250년 후 흥선 대원군이 어느 선비에게 낡은 돗자리를 선물 받았는데 이것이 이원익이 만든 돋자리란 것을 알고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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