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3대 대첩 김시민 진주대첩임진왜란 3대 대첩 김시민 진주대첩

Posted at 2015. 5. 17. 19:38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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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 대첩 김시민 진주대첩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그리고 임진왜란의 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전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이다. 어떤 전투였을까?

 

진주대첩 김시민 장군의 영정

 

|김시민 장군은 누구?

 

1554년 명종대에 충청도 천안에서 태어난 김시민은 어렸을 적부터 장군의 기질을 타고 났다고 전해진다. 8살때 마을의 가축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뱀을 활로 쏘아 죽일 정도로 담대하였으며 그 기골이 장대했다. 1578년 처음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며 1581년 부평부사에 임명되었지만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소극적이라며 파직되었다.

 

이후 1583년 북쪽 여진족 니탕개를 정벌할 시에 정언신의 지휘아래 신립, 이순신 등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훈련원 판관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때 우리나라 국방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조정에 군대 개혁 건의를 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고 평화로운 시기라며 묵살 당하자 훈련원 판관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온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1591년 선조 24년 진주성을 지키는 진주통판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 이경이 도망가버렸는데 이에 김시민이 진주성 수비를 담당하는 진주목사 자리에 오르게 된다.

 

 

 

경상남도 진해 위치

 

|진주대첩 발발 배경

 

임진왜란 직후 임진왜란 초기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점령하며 우리 국토를 짓밟은 왜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게 해상로를 빼앗기고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로 인해 심각한 군량부족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자 왜군은 군량을 확보하고 이순신의 수군 군영을 직접 치기 위해 전라도 장악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그런데 전라도를 완벽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경상도 점령은 물론 전라도로 통하는 관문인 진주성을 반드시 넘어야 했다. 해서 왜군은 1592년 7월 진주성 인근의 진해 고성을 점령하며 진주성 공략에 야욕을 불태운다.

 

하지만 진주는 천혜의 요소중 하나로 그 앞은 남강이 흐르고 주위는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 쌓여 아무리 많은 숫자의 왜군이라도 뚫는데 어느 정도 각오를 하여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는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알려져 전라도 장악을 위해 마침내 진주성 총공격 명력을 내렸고 왜군 정예병들이 모두 김해로 집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4일 3만여명이 넘는 왜군이 창원, 함안을 부수며 진주성으로 모여들어 진주대첩의 서막이 울린다.

 

옛 진주성도

 

|진주대첩 발발 조선상황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김해에 왜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민은 당시 진주성에 있던 관군 3천 8백명과 백성이 합세해 왜군을 막아내겠다는 필사의 각오를 다진다. 또한 그는 당시 왜군을 벌벌 떨게 만든 홍의장군 곽재우는 물론 다른 지역의 의병에게도 격문을 띄워 함께 왜군을 쳐부술 것을 당부하였고 화약무기 비축은 물론 만반의 준비를 다한다.

 

그리고 마침내 1592년 10월 5일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3만의 왜군은 진주성을 짓쳐들어온다. 하지만 천혜의 요새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는 주춤할 수 밖에 없었고 또 성 밖에는 의병장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군의 배후를 노리고 있어서 본격적인 공격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주대첩 3D 애니메이션 캡쳐

 

|진주대첩 전개

 

왜군은 먼저 주위의 민가를 불태우고 조총을 사용하여 진주성에 일제 사격을 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미리 준비해 놓은 화약을 통해 현자총통을 동원하여 포사격을 했으며 관군은 화살을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로 왜군에게 필사의 공격을 다한다.

 

또한 임계영 최경회의 의병 2천여명이 왜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곽재우도 피리를 동원한 심리전과 후방을 교란시키면서 왜군을 흔들었다. 5일에 걸쳐 진주성 전투는 쉬지 않고 벌어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군 역시 진주성 점령에 노력을 다하면서 진주성이 함락될뻔도 했으나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성벽을 넘어오는 수많은 왜군과 육박전도 마다치 않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낸다.

 

그리고 10월 10일 진주성 전투 마지막 날에 왜군은 마지막 총공세를 가하여 진주성 성벽을 점령하였고 성안에서 난전은 벌어진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은 왜군의 조총에 맞아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김시민 장군이 쓰러지자 당시 곤양군수였던 이광익이 조선군을 지휘 결국 일본군을 퇴각시키고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하지만 조총을 맞고 의식을 잃었던 김시민 장군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마니 이것이 바로 진주대첩이다.

 

진주대첩 민속화

 

|진주대첩 승리

 

진주대첩의 승리는 임진왜란에서 특히나 큰 의미를 갖는다. 일단 가장 직접적으로 조선의 3천800명의 군사로 왜군 3만명을 막아낸 전투이며 이때 조선군 피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본군은 지휘관급 300여명을 비롯하여 왜군 총 1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왜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것을 막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도망갔다고 하니 그 피해는 더욱 대단했을 것이다.

 

또한 이 전투를 통해 왜군의 전라도 진출 야욕을 완벽히 파쇄 했으며 조선 수군 군영을 지켜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또한 이 전투는 무엇보다 우리 관군과 의병 즉 백성이 함께 힘을 모아 싸운 첫 대승이자 전투로 향후 우리 조선군 전체의 사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년후 비록 진주성은 왜군의 2차 공격에 의해 함락 되기 했으나 2차대첩 역시도 왜군에게 지대한 큰 타격을 입히며 조선에게는 자랑스러운 성으로 왜군에게는 치욕의 성으로 기억되게 한 전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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